brunch

매거진 소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고 Mar 02. 2016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여성들, 03

소피 마르소 / 소피아 로렌 / 비비안 리 / 카르멘 델오레피스


게만 보였던 여정이 어느새 절반을 넘었다. 이번엔 처음으로 모델을 소개한다. 70~80년대 여성 배우들을 말하던 포스팅이 지난 회차의 주제였다면, 이번 포스팅부터는 80년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아이콘들이 등장한다. 이 포스팅 이후 지인들의 리스트 공개 압박이 늘었다. 살짝 다음 포스팅을 스포일러 하면 다음화에서는 국내 미녀 배우들 여섯을, 마지막에는 현대 미녀 둘을 소개할 예정이다.


아름다움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세상이다. "오늘 예쁘다"라는 말은 '아름다워라'라는 남성의 강요가 들어갔다고 표현하는가 하면 칭찬의 의미가 차별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오해를 살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그녀들을 추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뽑았다. 이 리스트는 칭찬의 의미 보단 존경과 헌사(tribute)의 목록이다. 그 시절 우리의 아이콘이자 여신들을. 배우로서 당당하게 자신을 산화하고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들을 만나보자.





09. 소피 마르소 (Sophie Marceau, 1966~, 프랑스)



피 마르소는 노동자 계급의 부모 아래서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만은 않았던 그녀는 주중엔 가족의 식당 일을 도왔고, 주말에는 작은집에서 생활했다. 부모는 그녀가 9살이 되던 해에 이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행복하게 회상한다.


소피가 14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10대를 위한 모델 에이전시에 그녀의 사진을 들고 갔다. 그렇지만 소피가 캐스팅이 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라붐 La Boum, the party>의 캐스팅 감독이었던 프랑스와즈 메 니드 레(Françoise Menidrey)가 한 모델 에이전시에게 배우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 에이전시는 소피의 어머니가 사진을 냈던 곳이었고, 에이전시는 소피 마르소를 추천한다. 그녀는 <라붐> 촬영 도중 고몽(Gaumont) 영화사의 알랭 푸아레와 장기 계약을 맺는다. 고몽 영화사는 니콜라스 세이두가 대표이사로 있고, 그의 증손녀는 현재 프랑스 3대 여배우인 레아 세이두다.



라붐 이야기를 마치자. 10대 청춘물인 <라붐>은 프랑스에서만 450만의 관객을 불러들일 정도로 대히트했다. 1982년, 소피 마르소는 차기작 <라붐 2>에 출연하는 조건으로 고몽과 100만 프랑스 프랑의 계약금을 받는다. <라붐 2>는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일대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 대한민국 등 아시아에서도 대성했다. 소피 마르소가 '책받침 여신'이 되는 순간이다.


소피 마르소는 평단으로부터 얼굴로만 뜬 배우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이런 비판을 의식이라도 한 듯, 이후 영화에서 불량소녀 역할을 밭는가 하면 파격적인 노출 연기와 정사씬으로 이미지 탈피를 시도한다. 그녀는 쉬는 기간 없이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브레이브 하트(1995)>, <한 여름밤의 꿈(1999)>, 그리고 <007 언리미티드 The World is not Enough> 등의 작품을 남겼다.


소피 마르소는 한국 대중들에게 아름답고 청순가련한 이미지로 주로 알려져 있지만, 영화감독을 했던 경험뿐만 아니라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반자전적인 소설을 쓰기도(거짓말하는 여자, Menteuse)하는 등, 영화 전반적인 영역에서 재능을 펼쳤다.



소피 마르소의 배우자는 총 세명으로 폴란드 영화감독이었던 안제이 주와프스키, 짐 램리, 그리고 프랑스 배우인 크리스토페 랑베르였다. 마지막 남편과는 2014년에 이혼했으며, 슬하에 자식 둘을 둔 싱글맘이다.




10. 소피아 로렌 (Sophia Loren, 1934~, 이탈리아)



소피아 로렌은 이탈리아의 배우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모다. 그러나 독재와는 관련 없이 그녀의 삶은 청렴 그 자체다. 소피아 로렌은 지금까지도 주요 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후배들의 갈채 속에 공로상을 받는 존경받는 영화인이다.

소피아 로렌은 나이를 속이고 미인대회에 출전하며 모델로 활동했었다

로렌은 로마에서 태어나 나폴리에서 자랐다. 항구 도시에서 자란 그녀는 시원한 이목구비와 육감적인 몸매 덕분에 나이를 속이고 미인 대회에 출전하며 모델로 활동했다. 그녀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과의 만남 이후부터였다. 그녀는 <나폴리의 황금(1954)>에 과감한 요부로 등장해서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되는데, 그녀 나이 아직 십 대였다. 이후 <소렌토의 염문(1955)>과 <일 세노 디 베네 레(1955)>를 통해 이탈리아 섹스 심벌의 자리를 굳힌다.


할리우드 활동을 통해서 명성을 확고히 다진 소피아 로렌은 이탈리아로 돌아와 다시 한 번 데 시카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다. 이때 찍은 작품(<두 여인(1960)>)을 통해 그녀는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다.


데 시카 감독은 그녀를 통해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그렸다

데 시카 감독은 그녀를 통해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그렸다. 1. 임신한 여자를 체포하지 못하는 이탈리아 법을 악용해 7명의 아이를 낳는 밀수업자 아델리나, 2. 부자 남편에게 싫증을 느끼는 철부지 아내, 3. 신학도와 사랑에 빠지는 콜걸, 4. 사랑에 빠진 사업가를 위해서 남자의 사업 파트너들과 관계를 갖는 희한한 애정관을 가진 여성, 5. 전쟁으로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이 러시아에 살아 있음을 알게 되고 그를 찾아가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 등이 그랬다. 소피아 로렌은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감히 소화하지 못하는 역할을 과감히 맡았고, 그녀의 삶에 당당했다.


소피아 로렌은 연상의 영화 제작자 카를로 폰티와 결혼한다. 폰티는 로렌보다 스물 두 살이 더 많았다


23살이 되던 해, 소피아 로렌은 연상의 영화 제작자 카를로 폰티와 결혼한다. 폰티는 로렌보다 무려 22살이 많은 연상남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결혼을 실눈을 뜨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폰티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약 40여 년의 기간을 그에게 충실했다. 소피아 로렌은 폰티가 죽기 전까지 그의 병상을 사랑으로 지켰다.

그녀는 영화에서 시대의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자존과 사랑을 그려가는 여인으로 묘사됐다. 소피아 로렌은 80년대, 남성들의 소모 대상으로 등장했던 할리우드 여배우들 속에서 꼿꼿이 자신의 사랑을 연기했다. 유혹에 빠지기 쉬운 자리에서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


소피아 로렌은 지금까지도 후배들의 갈채를 받으며 공로상을 받는 참된 영화인이다




11. 비비안 리 (Vivien Leigh, 1913~1967, 영국)



비비안 리만큼 아름다운 배우에게는 연기력이 필요 없을 것이다.
비비안 리만큼 연기력이 훌륭한 배우에게 아름다운 모습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 뉴욕타임스



비비안 리는 1913년 인도의 다즐링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유복한 집안에서 외동딸로 자랐다. 비비안은 연기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무용 등을 배웠다. 그녀는 평생 돈 걱정은 하지 않았다.


비비안 리는 영국으로 귀국한 이후 웨스트엔드의 연극 공연을 보며 배우가 될 결심을 한다. 비비안은 영국에서 그녀보다 13살 연상의 귀족인 하버트 리 홀먼과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반대로 배우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이후 출산과 가정주부 생활로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친구들의 독려로 영화에 단독으로 출연하게 된다. 비비안 리는 영화 직후에 연극 무대도 서는데, 연극이 처음이었음에도 평단으로부터 엄청난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완벽주의자였다. 비비안 리는 평단의 칭찬이 자신의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칭찬을 아끼지 않는 평론가들을 의심했다. 이후 그녀는 본인의 외모가 연기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다. 극복할 수 없는 강박이 생긴 것이다. 비비안 리는 스스로 만든 명제를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노력은 그녀에게 최고의 배우라는 타이틀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신경증을 심화시켰다.


비비안리와 로렌스 올리비에


그녀의 데뷔 무대가 올라갈 당시, 로렌스 올리비에라는 배우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비비안에게 반했고, 그녀에게 서슴없이 다가갔다. 둘은 곧 불륜 상대가 됐다. 그러나 비비안뿐만 아니라 로렌스 올리비에에게도 짝이 있었다. 둘은 결합하기 위해 각각의 배우자와 이혼을 시도했다. 그러나 양쪽이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을 막을 순 없었다. 비비안과 로렌스는 불륜을 계속한다. 불륜을 저지른다는 스트레스와 평소 좋지 않은 비비안 리의 건강 상태 때문에 그녀는 몇 번의 유산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조울증을 얻는다. 개인적으론 좋지 않은 시기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같은 해 그녀는 전설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출연하며 초특급 스타가 된다.


(왼쪽부터) 로렌스 올리비에, 비비안 리 / 마릴린 먼로, 아서 밀러

영화배우로 성공한 이후 그녀의 조울증은 점점 심해진다. 그녀는 주로 두 가지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첫 번째로 그녀는 스타가 아니라 배우로 기억되길 원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후 그녀를 스타로만 인식했다. 뿐만 아니라 비비안 리는 외모에 대한 자각으로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두 번째 원인은 연인 로렌스 올리비에 때문이었다. 연예계 특성 상, 비비안은 연인인 올리비에와 작품에 함께 출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와 결혼식을 올린 후 함께 연극에 서는 일은 더욱 많아졌다. 이후 그녀는 남편의 연기와 자신을 계속해서 비교하는 버릇이 생긴다. 설상가상으로 평론가들은 "비비안은 영화 배우지 연극배우가 아니다", 또는 "비비안이 옥에 티였다" 같은 혹평을 내놓았다. 완벽주의자였던 비비안은 소수의 악평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고, 좋은 평가보다는 나쁜 평가에 집착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안 리

몇 번의 유산 이후에 그녀의 조울 증세는 더욱 악화됐다. 발작은 주로 연극 투어 중에 발병했는데, 한 번 증세가 일어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남편 올리비에를 폭행하는 등 온갖 과격한 행동을 했다. 그녀는 이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울다 쓰러져 기절했다. 기절 후 깨어난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남편이 조용히 다가와 지난 일을 얘기해주면 뒤늦은 자각 이후에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그녀의 증세는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고, 병세 때문에 투어 도중하차와 복귀를 반복해야 했다.


말론 브란도와 비비안 리, 둘은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후에 절친한 사이가 된다


이 와중에 그녀는 말론 브란도와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한다. 영화는 대성했고 다시 한 번 그녀가 세계적 여배우임을 입증한다. 그녀는 영화 촬영 이후 말론 브란도와 절친한 사이가 된다. 평단은 그녀의 노력의 결실에 감탄했다. 비비안 리는 평단과 배우들의 인정을 받는 배우가 됐다. 그러나 호주 투어 시기의 히스테리와 투어 도중 일어난 불장난(바람)은 남편 올리비에를 지치게 했다. 그녀는 1958년 남편인 올리비에와 별거했다. 2년 뒤 둘은 갈라선다.


비비안 리는 우울증세의 심화와 이혼 후 찾아온 고독, 흡연으로 인해 폐결핵에 걸린다. 그녀는 우울증과 병을 극복하지 못했고 1967년 사망한다. 사망 당시 그녀는 올리비에의 사진을 꼭 쥐고 있었다. 울리비에와 비비안 리는 이혼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했지만, 올리비에의 재혼으로 더 이상의 관계로는 진척되지 못했다. 올리비에는 그녀의 부고를 들은 날, 그녀가 나온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12. 카르멘 델오레피스 (Carmen Dellorefice, 1931~, 모델, 미국)


'클래스는 영원하다'. 롤렉스는 아이코닉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모델로 세우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특히 여성라인은 왠만하면 인물을 세우지 않는다.


카르멘 델오레피스는 모델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최고령 모델이고, 런던 예술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아이콘은 발레로 다져진 몸매와 백발이다. 카르멘은 15세에 최연소 보그 모델로 데뷔했다. (델오레피스는 델레 피체, 델로 피체로 불리기도 하나 한국어 표기법상 델오레피스가 맞다)


카르멘은 열 다섯살이 되던 해. 1947년 최연소 모델이자 보그 표지를 장식한다


나이가 들어서 열정이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에요
열정이 식으니 나이가 드는 것이죠


그녀는 우아한 여성이란 자연스럽게 시간과 함께 늙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르멘은 1947년 15세의 나이로 보그 표지모델로 데뷔했고, 2012년 뉴욕 패션위크에 최고령 모델로서 런웨이에 섰다. 각각 최연소/최고령의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또한 카르멘 델오레피스는 초현실주의 표현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뮤즈였다.



흰머리를 그냥 그대로 두었더니
어느 날 개성이 되어 있었어요


그녀는 자신의 나이 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또한 여성성은 세월 속에 사그라든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85세인 지금까지도 자신의 몸을 빛내고 있다. 미중년, 꽃중년 남성은 있으나, 아름다운 여배우는 찾기 어렵다는 농담이 있다. 카르멘은 이런 세간의 농담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고령의 나이에도 온몸에서 아름다움을 뿜는다. 그녀는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이면서 외면과 내면을 함께 가꾸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녀에게 나이는 정말로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카르멘 델오레피스는 2016년 기준 85세이다. 여전히 당당하고, 여전히 아름답다.




저는 '세월의 아름다움'이라는 걸
세계에 보여주고 싶어요



다음 편에 계속.


[1편 보러 가기]

[2편 보러 가기]


Special Thanks to: <美人> 서울미술관, <Den> no.60, bizkitz, SweetGayBar, jayjin, mue's blog, AFI(American Film Institute) Top 50 Female Stars)

매거진의 이전글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여성들, 0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