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한국 여배우 트로이카: 문희, 윤정희, 남정임 / 왕조현王祖賢
이번 아이콘은 한때 국내를 평정했던 배우들이다. 왕조현을 포함하여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남정임, 윤정희, 문희) 네 명을 실었다.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들이 없었다면 한국 영화계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는 배우를 살렸고, 배우는 영화계를 살렸다.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영화계는 좋은 시나리오보다 배우와 타인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본다는 감동이 더 컸던 시기다. 60년대는 TV 보급이 원활하지 않던 시기였다. 국민들의 유일한 오락거리는 영화 관람뿐이었다. 한국 영화계는 들불에 붙은 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한 해 1억 8000만 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이 시기 국내 배우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작(多作)과 소모로 인한 빠른 은퇴다. 트로이카 셋은 한 해 100편 이상의 영화를 찍었다. 영화관에는 동일 배우가 다섯 편 이상의 영화로 포스터를 건 적도 있었다. 배우들이 심적으로 받는 부담과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세 배우의 전성기 활동 기간이 7년이 채 되지 않는다. 트로이카 1세대인 윤정희는 당시 "사생활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고 고백한다. 이는 10년을 주기로 트로이카들이 세대교체를 하는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요즘처럼 아역부터 성인 배우까지, 또는 30년의 긴 활동기간을 갖는 배우는 없었다. 그러나 이 세 배우는 10년 동안 대한민국 영화계를 꽉 잡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경쟁했고, 서로에게 자극이 됐다. 트로이카의 이야기를 보기 전에 대만 출신 책받침 여신을 먼저 소개한다.
長退著著 (롱다리 아가씨)
왕조현은 대한민국 80년대 3대 책받침 여신(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 왕조현) 중 한 명이다. 그녀는 배우가 되기 이전에 농구 선수로 활동했다. 국가대표였다는 소문이 있지만 왕조현의 아버지가 국가대표 농구 코치였던 소문이 와전된 것이다. 왕조현은 1984년에 첫 영화 <올해에 초반은 추울 것이다>로 데뷔했다. 이후 1987년에 <천녀유혼>을 찍었다. 이 영화는 아시아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녀의 인기는 단발성에 그치게 된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꼽는데, 하나는 평범한 연기로 너무 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이미지를 소모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유부남 임건악(홍콩 최대 영화 배급사 대표)과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시선을 피할 수 없는 깊고 진한 눈매
그녀는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약 5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나 <천녀유혼>을 능가할 작품은 없었다. 1994년 왕조현은 이렇다 할 행보 없이 은퇴를 선언한다. 그러나 3년 뒤, 돌연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대중들의 관심을 끈다. 일본 영화계에 진출한다는 설이 돌았다. 그러나 두 작품 이후 차기작은 없었다. 그녀는 2002년 <미려상해> 촬영을 끝으로 캐나다 밴쿠버로 떠났다.
왕조현은 <천녀유혼> 촬영 후 배우 장국영과 절친한 사이가 된다. 때문에 장국영의 죽음이 알려졌을 당시 살이 찐 모습이 파파라치에 잡혀 많은 이들의 관심을 샀었다.(2004년 4월 30일 도깨비뉴스) 그러나 왕조현은 뮤직비디오 촬영 때문이었다고 해명했으며, 대중들의 관심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현재도 밴쿠버에서 독신으로 조용히 칩거 중이다.
장국영의 죽음이 알려졌을 당시 파파라치에 잡힌 모습(왼쪽)과 2014년 마흔한 살이 된 왕조현의 모습 (오른쪽)
1960년대 대한민국 여배우 트로이카: 문희 / 윤정희 / 남정임
문희는 1965년, 18세의 나이에 영화 <흑맥>으로 데뷔했다. 문희는 남정임, 문정희와 함께 60년대 대한민국 여배우 트로이카였다. 그녀는 데뷔 6년 간 약 200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 <흑맥>의 출연 당시 배우 엄앵란은 그녀를 처음 보고는 어린 나이에도 눈빛이 꺾이지 않는 모습을 봤다고 칭찬했다. 문희는 지적이고 우아했다.
1960년대는 우리나라 영화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너무나 많은 영화를 찍었어요.
(은퇴를 결심했던 당시) 연이은 밤샘 촬영에 너무 지쳤습니다.
문희가 데뷔 6년 만에 은퇴를 결심한 이유다. 그녀는 대한민국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이고 1세대 영화배우다. 그녀는 <미워도 다시 한번>, <초우>, <빛과 그림자>, <섬마을 선생> 등의 걸작을 남겼다. 그녀는 신성일과 <별난 부인>, <별난 새댁>등을 찍으며 콤비가 됐다. 그녀는 인기가 절정이던 1971년, 한국일보 부사장이었던 장강재와 결혼한다. 당시 출연 예정이던 영화(연인의 길)의 제작을 장강재 회장이 맡게 된 것이 인연이 됐다.
문희가 영화 <연인의 길>을 촬영했을 당시,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와서 자신을 차에 태우고 촬영장까지 운전했다. 문희는 운전하는 남자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별 관심이 없었다. 영화사에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주기 위해 운전기사와 차를 제공해준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매일같이 차로 태워다 준 사람이 바로 장강재 회장이었다.(당시 사장) 장강재 사장은 무척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그는 조용히 <연인의 길> 제작을 지원했고, 이를 계기로 사랑을 싹 틔운다.
결혼 후 그녀는 한 번도 대중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강재 회장은 48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문희는 그 충격에 2년 동안 집에서만 칩거하는 생활을 했다. 방송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자신이 내조를 못한 탓에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아 죄책감에 아무것도 못했다고 한다.
문희는 최근 방송에 등장하며 집을 공개하고, 딸들과 함께 국악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좋은 아침 14년 1월 29일 자) 현재 문희는 백상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며, 배우 이영애와 돈독한 사이다. 문희는 후배 이영애와 만나서 가끔씩 술도 마시고, 쌓인 이야기를 나누며 8년째 우정을 이어가고 있다.
윤정희는 남정임, 문희와 함께 60년대 대한민국 여배우 트로이카 1세대다. 그녀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1967년, 1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윤정희 역시 1세대 영화배우들의 특징답게 다작했다. 그녀는 1972년 <무녀도>, <궁녀> 등, 데뷔 후 7년 동안 약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수상 경력도 화려했다. 그녀는 청룡상, 대종상 등 여우주연상만 스물네 번 수상했다. 전성기 시절엔 주연 작품 다섯 개를 동시에 상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피로는 일감에 제곱으로 증가했다. 은퇴를 선언하던 당시 그녀는 "사생활이 없었다"고 그 이유를 고백했다.
은막의 여왕
7년 만에 300편의 영화를 찍으려면 1년에 최소 40편, 일주일에 한 편 꼴로 영화를 찍어야 한다. 그녀가 받은 스트레스는 엄청났을 것이다. 윤정희 역시 신성일과 파트너였다. 신성일과 윤정희는 약 99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 그녀는 여배우 트로이카 중 가장 곱고 우아했다.
윤정희는 1973년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 도중 돌연 프랑스 유학 소식과 함께 은퇴를 선언한다. 후에 밝혀졌지만 유학은 서강대 총장 신부의 도움이 컸다. 그녀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유학했다. 유학 도중 연하의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만나 결혼한다. 남편은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살았다. 그는 윤정희를 만났을 당시 그녀가 영화배우인지 몰랐다고 한다. 윤정희는 이후에도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윤정희는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천상 배우다. 50살이 되던 해 영화 <만무방(1994)>에 출연했으며, 66의 나이엔 이창동 감독의 <시(2010)>의 주연을 맡았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프랑스 칸 영화제에 초대됐고,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10분 동안 기립박수를 받았다. <시>는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고, 그녀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현재 윤정희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다. 그녀는 "90대가 되어서도 매력 있는 역할이 있을 거다"고 말하며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그녀는 한국 영화계의 살아있는 역사며 아름다운 배우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배우 윤정희와의 결혼은 '두 예술가의 만남'으로 세간에 화제가 됐었다. 둘은 오늘날까지 각자 예술의 길을 걷고 있다. 아름답다.
남정임은 1966년 춘원 이광수의 <유정>으로 데뷔했다. <유정>은 한국 최초로 TV 공개모집으로 배우를 캐스팅 한 작품이다. <유정>은 국도극장(1913년 문을 연 이래 80년 간 있던 극장)에서만 3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다.
남정임은 예쁘고 온순한 성격인데 질투가 많았다고 한다. 그녀의 라이벌은 문희와 윤정희였다. 그녀의 질투심에 관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집에 가는 길에 문희나 윤정희의 얼굴이 나온 영화 포스터를 보면 작품 욕심에 밥을 못 먹었다는 이야기다.
남정임은 한양대 연극 영화과 출신이다. 그녀는 <봄봄>, <악인 시대>, <초연> 등 약 360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녀의 배역은 주로 발랄하고 깜찍한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1971년 세종호텔에서 결혼하며 스크린을 떠났다. 이 날 결혼식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교통경찰까지 출동하며 하객들을 통제했다. 그녀의 결혼식엔 고은아, 윤정희, 신영균 등 당대 스타들이 모두 참석했다. 신영균은 식장에 늦게 들어오다가 몰린 인파로 인해 양복이 찢겨 되돌아갔다. 그녀는 워커힐 호텔에서 신혼 초야를 지냈다.
1970년 정인엽 감독의 <결혼 교실>에서 윤정희, 문희와 함께 트로이카 삼인방이 출연한 바 있다. 그녀는 3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이혼했고, 다시 영화계에 복귀했다. 이후 남정임은 <웃음소리>, <나는 고백한다>, <외길 가게 하소서>등의 작품을 남겼다. 대중들은 남정임을 60년 트로이카 중 선이 가장 가늘고 여린 배우라고 평가했다.
남정임은 1989년 6월 유방암을 진단받고 홀로 투병했다. 3년 뒤인 1992년, 그녀는 47세의 나이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왼쪽 사진) 영화 <결혼 교실(1970)>은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마지막 결합이었다. 왼쪽부터 문희, 남정임, 윤정희
(오른쪽 사진) 서울신문에 나온 남정임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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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anks to: <美人> 서울미술관, <Den> no.60, bizkitz, SweetGayBar, jayjin, mue's blog, AFI(American Film Institute) Top 50 Female St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