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 여배우 트로이카: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
이번 아이콘은 1970년대 국내 영화계를 평정했던 배우들이다. 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남정임, 윤정희, 문희)에 이어 70년대 트로이카(유지인, 정윤희, 장미희) 세 명을 실었다. 독자들 몇몇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들이 없었다면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없었을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는 배우를 세웠고, 배우는 업계를 살렸다.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영화계는 좋은 시나리오보다 배우와 타인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본다는 감동이 더 컸던 시기다. 70년대는 TV 보급이 막 시작되던 시기다. 국민들은 극장과 TV 앞으로 모였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들불에 붙은 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이 시기 국내 배우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작(多作)과 소모로 인한 빠른 은퇴다. 트로이카 여섯은 한 해 100편 이상의 영화를 찍었다. 영화관에는 동일 배우가 다섯 편 이상의 영화로 포스터를 건 적도 있었다. 배우들이 심적으로 받는 부담과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여섯 배우의 전성기 활동 기간이 7년이 채 되지 않는다.
트로이카 1세대인 윤정희는 당시 "사생활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고 고백한다. 이는 10년마다 여배우 트로이카가 세대교체를 하는 주 요인이기도 했다. 요즘처럼 아역부터 성인 배우까지 또는 30년의 긴 활동기간을 갖는 배우는 없었다. 그러나 이 여섯 배우는 20년의 기간 동안 대한민국 영화계를 꽉 잡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경쟁했고, 서로에게 자극이 됐다. 60년대 삼두마차 이야기는 4번째 이야기(여기)에서 했다. 이제 70년대 삼두마차를 만날 차례다.
유지인은 정윤희, 장미희와 더불어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공적이 있다. 유지인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3년 TBC 탤런트로 입사했다. 중앙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지인은 대학생 대상 잡지에 표지모델로 실리며 대중 앞에 섰다. 그녀는 <그대의 찬손>으로 데뷔했다. 당시 스크린 경쟁률은 2300대 1이었다.
이후 그녀의 차기작 드라마 <서울 야곡(1977)>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 유지인은 같은 해 해 TBC 드라마인 <청실홍실>의 주연인 장미희, 정윤희와 함께 출연하며 트로이카 자리를 굳힌다. 그녀의 영화인 <청춘의 덫>, <내가 버린 남자> 등은 그녀의 인기와 함께 대성했다. 유지인은 영화 <심봤다>로 삼두마차 배우들 중 처음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그녀는 영화 <26x365=0>이라는 작품으로도 유명한데, 영화는 스물여섯 살의 여성이 호스티스로 일하며 밤새 술을 따르며 365일 일해도 남는 것이 없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유지인은 1980년 이두용 감독의 <피막>이라는 영화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본선에 진출한다. 이는 세계가 한국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되는 계기가 된다. <피막>은 세계에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첫 작품이다.
유지인은 의사 남편과 1986년에 결혼식을 올린다. 당시 남편의 부모는 대전에서 개업 중이었고, 남편은 2대째 가업을 잇고 있었다. 유지인은 용평 스키클럽 회원이었고,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1984년 스키장에서 만나 3년 동안 연애한다. 처음에는 남편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했었다. 유지인이 연예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고, 유지인은 결혼 발표와 동시에 연예계를 은퇴했다.
그녀는 스캔들 한 번 없이 연예계 생활을 정리했고, 17년이 지난 2002년에 스크린에 복귀했다. 남편과는 같은 해에 이혼했다. 그녀는 독신을 선언했다. 유지인은 현재 방송인, 대학 교수로 활동 중이다.
한국이 사랑한 여배우
정윤희는 유지인, 장미희와 더불어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이다. 그녀는 1954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이후 <나는 77번 아가씨>, <꽃순이를 아시나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를 찍으며 큰 인기를 누린다. 정윤희는 짙은 눈썹과 동그랗고 큰 눈, 오뚝한 코와 도톰한 입술이 잘 조화된 외모를 가졌다. 대중은 그녀를 고전미와 청순미를 두루 갖춘 미인으로 평가했다. 정윤희는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꼽혔고, 일본에서는 아시아 최고의 미모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
동양의 꽃
'동양의 꽃'은 정윤희의 별명이다. 그녀의 빼어난 외모는 일본과 대만에도 알려져 외국 감독들에게까지 러브콜을 받을 정도였다. 또한 '동경가요제'에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참석하여 영화 <러브스토리>로 알려진 알리 맥그로우와 함께 시상을 하기도 했다.
성룡은 스스로 정윤희의 열렬한 팬임을 자청했고, 이상형으로 그녀를 꼽았다. 이 때문에 한 때 두 사람 사이에 스캔들이 난 적도 있다. 그렇지만 빼어난 외모와는 달리 데뷔 초 정윤희의 연기 평가는 좋지 않았다. 예쁜 미모와 인기 때문에 감독들이 어쩔 수 없이 쓰는 배우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러나 영화 <최후의 증인(1980)>을 계기로 이러한 평가는 깨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빨치산 대장의 딸을 연기했다. 영화에서 정윤희는 기구한 인생을 사는 여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평단과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정윤희는 1980년과 81년에 2회 연속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1년에 받은 대종상 수상 소감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당돌한 말 같지만 이제야 연기가 뭔지 알 것 같아요
- 1981년 대종상 수상 소감 -
이후 그녀는 삼두마차 최고의 자리를 독차지한다. 그녀와 장일호 감독이 연출한 <사랑하는 사람아>는 대만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정윤희가 영화 홍보차 대만을 방문했을 당시 수많은 취재진 때문에 인파 자체가 뉴스거리가 된 적도 있다. 그녀는 일본에서 달력 모델과 초콜릿 광고를 찍는 등 아시아의 연인으로 부상했다.
트로이카의 중심이었던 그녀였기에 그녀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녀는 중앙건설 조규영 회장과 결혼했다. 혼인 당시 정윤희의 나이는 30세, 조규영 회장의 나이는 38세였다. 조규영 회장은 친지의 소개로 정윤희를 만난다. (중앙건설은 하이츠 아파트로 알려져 있다)
정윤희와 조규영 회장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다. 조규영 회장이 유부남인 상태에서 정윤희와 연애를 한 것이 문제였다.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과정에서 교제를 시작한 둘이었지만 엄연한 간통이었다. 두 사람은 1984년 8월 간통 혐의로 옥살이를 한다. 이후 조규영 회장은 전 부인과 이혼을 조건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줬고, 합의하에 이혼한다. 정윤희는 1984년 심재석 감독의 <사랑의 찬가>를 마지막으로 조규영 회장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방송국은 정윤희를 출연 금지시켰다. 그녀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연예계를 은퇴한다.
정윤희의 주변은 그녀의 인기만큼이나 루머가 끊이지 않았다. 성룡과의 열애설, 조규영 회장과의 이야기 등. 안 좋은 소문과 기사가 많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정윤희는 당대 트로이카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추억한다.
영화 <달콤한 인생> 당시 정윤희
장미희는 유지인, 정윤회와 더불어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이다. 그녀는 1975년에 TBC 특채 탤런트로 뽑혔고, 1976년 박태원 감독의 신인배우 공채 모집에서 276대 1의 경쟁을 뚫고 스크린에 데뷔했다. 그녀는 70년대 삼두마차 중 현재까지 활동하는 유일한 배우다. 그녀는 지금까지 본연의 고고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어린 시절 장미희는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활달해서 배구와 농구를 했다. 장미희는 두 달에 하루 정도는 꾀병을 부려 학교를 빠지기도 했다. 학창 시절 그녀는 개구쟁이였다. 원래 선생님이 꿈이었던 그녀는 고등학교 때 미대에 다니던 언니의 권유로 미스 성춘향 대회에 참가했다가 연예계에 데뷔한다. 그녀가 주로 맡았던 배역은 차가운 도시 여성이었다. 당대 여배우들이 섹시하거나 청순함으로 어필했던 것과는 다른 노선을 걸었다. 대중들은 그런 그녀를 주목했다. 데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79년 여배우 중 최고 수입을 올리며 당대 최고의 미녀임을 (경제적으로) 증명했다.
그녀의 1992년 대종상 수상 소감은 지금까지도 숱한 오마주와 패러디를 양산했다. 그녀는 당돌하고 화끈했다. 대중은 그녀의 매력에 푹 빠졌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 1992년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
장미희는 지속적으로 배우 생활을 한다. 그녀는 70년대 배우 중 유일하게 다작하지 않은 배우였으며,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작품에만 출연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2007년 배우 학력 위조 사건으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준다. 당시 장미희는 프로필에 장충여고 졸, 동국대 불교학과 졸, 미국 호손대 교육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그녀의 고등학교와 동국대 학력이 위조임이 밝혀진다. 그녀의 학력 위조 사건은 명지대 교수직의 재직 자격에 의문을 제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녀는 여전히 명지전문대학 연극영상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장미희는 2008년 <엄마가 뿔났다>에 출연하며 위기를 극복했다. 당시 장미희가 맡았던 역할은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었고, 대중들은 그녀의 연기를 재조명했다. 팬덤은 스타의 과오를 흐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신현택 감독은 장미희에게 배역의 자유를 허락했고, 장미희는 스크린에서 유감없이 그녀의 패션과 연기력을 펼쳤다. 그녀는 깊은 연기 내공을 둘렀고, 의상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패셔니스타의 진가가 드러났다. 관객들은 의상과 연기력, 외모까지 모두 갖춘 악녀에게 빨려 들었다. 그녀가 연기한 장백로는 악역이었지만 대중들은 인간적인 악역을 보며 함께 울고 웃었다.
장미희는 오늘날까지도 작품 선정에 신중하다. 그녀는 일 년에 한 편 정도의 작품만 출연하며, 계속해서 좋은 작품을 찾는다. 2000년대 <육남매>, <오자룡이 간다> 등 그녀가 등장한 작품의 수는 많지 않지만 대중은 그녀의 얼굴이 익숙하다. 그녀의 연기 내공 때문이다. 그녀의 연기는 대중들에게 일 년 내내 장미희라는 배우를 기억하게 한다.
저와 생각이 같고, 동반자로서 서로 존중할 수 있고, 같이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으면 지금도 결혼하고 싶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그런 사람을 만나진 못했어요
장미희는 싱글이다. 그녀는 한 매체에서 스물여섯부터 서른여섯까지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결혼 문제 때문에 갈등도 많았고, 결혼생활에 대한 궁금증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을 한다는 것에 대해 계속 신중했고, 강의와 연기도 놓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말한 '그녀가 싱글인 이유'다.
장미희는 패션에 관심이 많고, 옷을 잘 입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대표적인 중년 패셔니스타로 각종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는다. 또한 그녀는 에르메스가 공식적으로 협찬을 허락한 대한민국 유일한 배우다. 에르메스 관계자는 "장미희 씨가 에르메스 옷을 즐겨 입는 고객인 데다 평소 패션은 물론 미술,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예술가들을 후원해 온 우리 브랜드 콘셉트가 잘 맞는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여성동아, Fashion Hot issue, 11년 7월 1일 기사)
장미희는 60년대에 윤정희가 그랬듯, 7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꾸준히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녀는 대한민국 영화와 드라마의 살아 있는 역사다. 앞으로도 그녀의 행보가 기다려진다.
마지막 편에 이어짐.
Special Thanks to: <美人> 서울미술관, <Den> no.60, bizkitz, SweetGayBar, jayjin, mue's blog, AFI(American Film Institute) Top 50 Female St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