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세, 제니퍼 로렌스
길었던 여정도 어느새 끝이 보인다. 필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한강을 한 바퀴 걷고 과일을 이 만원 어치 사 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냉장고를 채웠다. "누가 오시나 봐요." 자주 가던 과일집 아주머니의 말이다. "아니에요. 오늘 집에서 안 나올 거라서요." 나는 웃으며 답한다. 토요일은 하고 싶던 일을 하는 날이다. 책상 위에 쌓여있는 A4 인쇄물 읽기, 신문 보기, 책 읽기 등. 냉장고에서 음식을 하나씩 꺼내 먹으면서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날이다. 그렇지만 우선 이 글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지난 미녀들을 반추하면서 필자가 내내 말하고 싶던 한 가지는 미모가 아름다움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흔히 팔자가 사납다고 한다. 옛 말에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했다. 영어로도 있다. '아름다움과 장수는 한꺼번에 이루기 어렵다 Beauty and long life seldom go hand in hand.'라고. 이 말은 비단 미모에만 국한된 말은 아닐 것이다. 재능이 많은 사람들의 삶은 대체로 불행하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덩어리로 더 높게 서려면 땅에 닿은 부분은 뾰족해져야 한다. 바닥이 얇을수록 생애 균형은 점차 잡기 어려워진다. 쓰러졌을 때 재기하기도 어렵다. 미모는 참 쓰러지기 쉬운 재능이다. 미모라는 재능은 세월이라는 바람 앞에 너무도 쉽게 쓸려나가는 가치다. 여배우들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고, 그들의 배우자가 여배우 한 사람을 사랑하기도 어려운 것은 이 빛을 따라 모였다가 그 불의 세기에 날개가 다 타버렸기 때문이리라.
오늘날 미모라는 가치 외에 다른 것들이 조명받고 있다. 소모되는 여성은 조금씩 줄고 있다. 그렇지만 영원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원래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자. 이번엔 필자 주관으로 아름다운 외모 뿐 아니라 다른 가치를 함께 가지고 있는 현대 미녀 둘을 뽑았다.
그리고 필자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름다워지고 싶어 한다는 걸. 단 하루만이라도.
"Queen Bey"
"여왕 비(애칭)"
비욘세는 21세기 미국의 대표적 국민스타이자 아이콘이다. 특히 흑인 여성들에겐 우상과 같다. 비욘세는 그래미 역사상 가장 많은 지명과 상을 받은 팝 여가수다. 라이브 퍼포먼스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아름다운 외모 또한 그녀의 명성을 높인다. 비욘세는 1997년 데뷔하여 솔로 앨범은 1억 8000만 장, 그룹이었던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앨범도 6000만 장 팔았다. 빌보드 선정 2000년대 가장 성공한 여성 아티스트 1위, 2010~2014년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1위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스스로를 모던 데이 페미니스트(Modern-Day Feminist)라고 정의한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다.
비욘세는 부유한 부모님 아래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어린 비욘세는 평소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흥얼거리던 노래를 받아 부르면서 그 재능이 드러났다. 이후 무대에만 오르면 자신감이 넘치고 즐기는 모습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비욘세는 데스티니 차일드 결성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1989년 8살이 되던 해 첫 멤버인 라타 비아 로버슨을 만나고 1997년 데뷔까지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녀는 <스타 서치>라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 탈락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가수의 벽 때문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메튜 놀스(아버지)의 끊임없는 서포트와 멤버들에 대한 신뢰로 결국 일렉트라 레코드와 계약을 맺는다. 이후 1996년 드디어 콜롬비아 레코드와 계약을 맺는 것으로 성공 가도에 오른다.
데스티니 차일드 시절부터 대중들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대중들은 그룹의 첫 히트곡("No. No. No")을 사랑했고, 평단은 올해의 최우수 알앤비/소울 앨범과 싱글 그리고 랩 신인상을 안겨 준다.(소울 트레인 레이디 오브 소울 어워드) 이후 "Say my name", "The Writing's on the Wall" 등 각종 히트곡을 연달아 낸다. 언론들은 데스티니 차일드가 TLC를 잇는 최고의 알앤비 그룹이라는 평가를 한 바 있다. 그러나 데스티니 차일드의 영광은 오래지 못했다. 그룹 멤버인 레토야와 로버슨은 메튜 놀스의 관리가 불만이었다. 결국 둘은 탈퇴를 선언했고, 언론은 비욘세를 그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 시기에 비욘세는 오랫동안 만나던 남자친구와 헤어진다. 그녀는 몇 년간 우울증을 겪는다. 며칠간을 방에서 지낼 뿐만 아니라 먹는 것을 거부했다. 이를 극복하는데만 2년이 걸렸고, 이후 데스티니 차일드는 "Independent Woman Part I", "Survivor", "Bootylicious"와 같은 명곡들을 발표했지만 2001년 10월 캐럴 앨범을 마지막으로 해체한다.
비욘세는 2002년부터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녀는 "Déjà Vu", "Irreplaceable", "Listen", "If I were a boy" 등 명반을 줄줄이 발매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녀는 2008년 미국의 유명 래퍼 제이-지와 결혼한다. 이후 2008년 "I am Sasha Fierce"를 발매한다. "Single Ladies", "Halo"와 같은 음악을 발표한다. 명곡/명반의 연속이다.
그녀는 자신 안에 사샤 피어스 Sasha Fierece라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 무대 위에서 그녀가 폭발적일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사샤 덕분임을 밝힌 바 있다.
무대에서 사샤 피어스로 변할 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사샤 피어스를 통해 무대에서 파워풀하고 대담하게 퍼포먼스를 할 수 있어요. 사샤 피어스는 (저에게) 일종의 면죄부예요.
-티브이데일리 09년 10월 14일 기사-
비욘세는 2006년부터 베이시스트, 드러머, 기타리스트, 호른 플레이어 등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진 슈가 마마라는 밴드와 함께 투어 공연을 하고 있다. 2013년 <보그>지 와 인터뷰에서 비욘세는 자신을 현대판 페미니스트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평등을 믿지 않는다 밝혔다.(14년 12월) 2013년 TEDx에서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가 연설한 "우리 모두는 페미니스트이다"라는 말을 그 해 말 자신의 노래 "Flawless"에 샘플링하며 페미니스트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여성들의 리더십을 장려하기 위해 텔레비전과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밴 보시(Ban Bossy) 캠페인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USA 투데이, 2014년 10월) 또한 비욘세는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구지가 세운 차임 포 체인지(Chime for Change)의 공동 설립자이며, 기부금을 모으기 위한 콘서트의 헤드라이너였다. 지금까지도 많은 자선 사업을 진행중이다.
누가 세상을 이끄나?
여자들!
- Run the World, 가사 중 -
그녀의 노래는 여성의 당당함과 자립을 노래한다. "Run the World"에서 그녀는 이 곡을 스스로를 위해 열심히 사는 여자들을 위해 노래한다. 가사는 9시부터 5시까지 일하고 수표를 받고, (남자들은) 나의 반짝임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그녀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21세기 최고의 가수이자 미국이 사랑하는 아티스트다.
혜성같이 나타난 할리우드의 보석
제니퍼 로렌스는 미국 켄터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어린이 캠프 매니저였고, 아버지는 콘크리트 건설사 사장이었다. 그녀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14살에 부모를 설득해 뉴욕의 텔런트 에이전트에 들어간다. 뉴욕에 들어가기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말에 남들은 4년 동안 다니는 학교를 2년 만에 졸업했다. 그녀는 뉴욕에서 광고와 영화 배역을 맡은 뒤부터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는다.
제니퍼 로렌스는 다소 성숙해 보이는 외모로 장녀나 소년 가장 역할을 많이 맡았다. 우수에 찬 눈빛 때문에 어딘가는 슬퍼 보이고, 그늘져 보이는 면이 있지만 실제로는 유쾌하고 당당한 성격이다. 되려 그녀의 활기찬 성격과 직설적인 언행 때문에 소녀 같다는 평과 무례하다고 불편하다는 평가가 공존하는 배우다.
매일 보고, 듣는 것이 남자들이 자기 의견을 말하는 건데, 제가 똑같은 태도로 제 의견을 말하면 마치 뭔가 모욕적인 말이라도 한 것처럼 반응합니다.
제니퍼 로렌스는 2008년 <가든파티>로 데뷔했다. 그녀의 본격적인 성공은 2010년의 <윈터스 본> 덕분 이었다. 이 영화는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로렌스는 오자크의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으며 정신병이 있는 엄마, 여동생, 남동생을 보살피는 '리 돌리' 역할을 연기했다. 평단은 로렌스의 연기를 높이 평가했다.
로렌스의 연기는 연기 그 이상으로, 폭풍의 모임 같다.
로렌스의 눈은 리에게서 흐르는 눈물의 로드맵이다.
- <롤링 스톤> 피터 트래버스 -
이후 그녀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헝거게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아메리칸 허슬> 등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녀는 오크사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여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된 바 있고, 이후 오스카에 세 번이나 후보로 지명되는 가장 어린 여배우로 지목된 바 있다.
그녀는 무례하고, 난잡하고, 웃기고, 입이 거칠고, 엉성하고, 섹시하고, 활치가며, 섬약한 캐릭터 연기를 보였고, 때로는 한 장면 안에서 심지어는 한 호흡 안에 모두 들어있다.
그녀는 현재 할리우드 여배우 수입 1위다. 그러나 로렌스는 그녀의 수입에 대해서 출연료 성차별이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남자 배우와 본인의 계약료에 차이가 남을 당당히 밝혔다. 이 같은 비화를 스스로 밝힌 것은 아니다. 지난 2014년 소니 픽처스 해킹 사태로 함께 유출된 출연료 목록이 도화선이 됐다. <아메리칸 허슬>에서 데이비드 오 러셀 감독이 9%, 주연 브래들리 쿠퍼, 크리스천 베일, 제리미 러너가 9%를 받은데 비해 제니퍼 로렌스와 에이미 아담스가 각각 7%를 받은 것.
(소니 해킹 사태로 알게 된 개런티 문제에 대해) 버릇없는 여자처럼 보일까 봐 더 많은 돈을 요구하지 못했다. 안타깝다.
-페이지 식스, 10월 13일 자-
그녀의 이런 발언에 대하여 엠마 왓슨, 엘리자베스 뱅크스, 제시카 차스테인 등은 출연료 성차별에 지지하고 공감했다. 현재 그녀는 불우한 환경을 딛고 성공한 여성 CEO의 실화를 다룬 영화 <조이(2016)>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번에 선정한 두 명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영역 외적인 부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두 미녀는 둘 다 본인의 업에서 최고가 된 사람들일 뿐 아니라, 그 위에 시대정신(Zeitgeist)을 얹었다. 이것은 필자의 선정 기준이기도 했다. 기준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해당 분야에서 최고인 여성 아티스트일 것, 그리고 시대정신을 가질 것. 비욘세와 제니퍼 로렌스다.
헤겔은 '시대정신'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면서 "이것은 한 시대가 끝난 뒤에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필자는 현대 사회에서 시대정신은 여럿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울어진 판 위에 올라간 구는 여러 개의 쇠꼬챙이가 있을 때에만 세울 수 있기 마련이다. 비욘세와 제니퍼 로렌스. 두 사람은 현대의 아이콘이고 나아가서 시대의 아이콘이 될 것이다. 자립하는 여성들이 존경받는 사회다. 이전까진 여성의 자립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푸코의 말을 빌자면 주목과 두둔은 또 다른 차별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이 둘을 존경한다. 그러나 두둔하고 싶진 않다. 차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평등하게 시작한 사회는 현재 이들을 조명하며 여성 불평등을 이야기한다. 영국 배우인 엠마 왓슨은 평등 운동을 위해 연기 활동을 쉰다 밝혔다. 미국 배우 리즈 위더스푼은 시상식 레드 카펫에서 남자 배우와 달리 여자배우에게는 드레스와 메이크업 얘기만 물어본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녀는 “물론 패션을 좋아하고 어떤 디자이너의 옷을 입었는지에 대해 말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다른 질문도 받고 싶다”고 말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제시 아이젠버그와 서로 성 역할을 바꿔 질문하는 코미디 영상을 찍으며 “가장 좋아하는 가슴은 어떤 건가?” “혹시 임신했나?” 등의 질문을 던져 실제로 여배우들이 받는 질문의 수준에 대해 시니컬한 조롱을 날린 바 있다. (*하퍼스 바자 2015년 12월 22일, 안동선 에디터 글 인용) 이러한 사회 움직임이 평범하게 수그러 들 때가 오면,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는 '현대의 아이콘'보다 한 단계 올라간 '시대의 아이콘'이 되어 있을 것이다.
문득 대학에서 수업을 들었던 때가 생각난다. 한 교수에게 물었다. "페미니즘에서 내(남성)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를. 교수는 "없다"고 단칼에 잘랐다. 페미니스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 말고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차별에 대한 저항은 또 다른 차별이라는 푸코의 지배적 담론을 의식한 발언이셨으리라 감히 짐작할 뿐이다. 교수로부터 더 많은 설명을 들었지만 이 이상으로 필자의 생각을 밝히고 싶지 않다. 여기 안치환의 노래 한 소절을 인용한다.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 하늘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고,
계단을 타고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소리,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소.
이제 정말로 끝이다. 끝까지 읽어주심에 감사드린다. 독자분들의 열렬한 호응과 브런치, 카카오팀의 조명이 없었다면 길었던 여정을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과일을 꺼내먹을 때다.
Fin.
Special Thanks to: <美人> 서울미술관, <Den> no.60, bizkitz, SweetGayBar, jayjin, mue's blog, AFI(American Film Institute) Top 50 Female Stars), <하퍼스 바자>, 카카오, 브런치 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