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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Feb 29. 2016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여성들, 01

메릴린 먼로 / 오드리 헵번 / 엘리자베스 테일러 / 그레이스 켈리


날이 많이 춥다. 이제야 겨울이 온 것 같다. 이번 시리즈는 여러 전시와 잡지를 보던 중 한 번쯤 써보고 싶던 기획이다. 세기의 미녀를 추억하는 것. 주변에 CF 감독인 형님도 계시고, 가끔 옛 배우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원체 공감을 할 수 없었다. 아이코닉한 이미지로 나오는 몇몇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런데 시기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아름다움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세상이다. "오늘 예쁘다"라는 말은 '아름다워라'라는 남성의 강요가 들어갔다고 표현하는가 하면 칭찬의 의미가 차별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오해를 살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그녀들을 추억하고 싶었다. 용기 내서 뽑았다. 이 리스트는 칭찬의 리스트보단 존경과 헌사(tribute)의 목록이다. 그 시절 우리의 아이콘이자 여신들을. 배우로서 당당하게 자신을 산화하고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들을 기록했다. 배우 열여덟 명과, 모델 한 명, 그리고 가수 한 명을 추렸다.




01. 메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26~1962, 미국)


기의 섹스 심벌이자 비극적인 사생활로 잘 알려진 배우다. 정신장애가 있는 모친의 사생아로 태어나 양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세라는 이른 나이에 결혼하지만 4년 만에 헤어진다.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방위산업체에서 페인트 분무를 뿌리는 일을 하다가 부대 사진작가에 눈에 띄어 모델로 첫 커리어를 시작한다. 달력 누드모델로 활동한 것이 캐스팅 감독에게 눈에 들어 <쇼킹 미스 필그림>(1947)이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다. 첫 데뷔작이다.


이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백만 장자와 결혼하는 법>, <7년 만의 외출>, <뜨거운 것이 좋아>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세기의 섹스 심벌로 자리 잡았다.


마릴린 먼로는 '금발의 백치미' 컨셉으로 이름을 날렸고, 스스로 금발 = 백치 아이콘이 됐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는 달리 그녀는 실제론 똑똑했다.


먼로, 당신은 무얼 입고 자나요?

샤넬 no.5 몇 방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메릴린 먼로는 '금발의 백치미' 콘셉트로 이름을 날렸고, 금발 = 백치 아이콘은 오랜 기간 코드가 되기도, 희화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Dumb Blonde) 먼로는 이런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똑똑했다고 전해진다. 팬들이 선호하는 입맛에 맞춰 연기를 했다고. 먼로는 여성 운동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양부모에게 성추행당한 과거를 고백하는 등, 당대보다 앞서가는 시대 의식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녀의 아이코닉 이미지는 단연코 이 환풍구 씬이다. 영화 <7년만의 외출(1955)>

애정결핍 문제와 자신을 섹스 심벌로만 바라보는 영화계의 시선 때문인지 자신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려는 사람에게 유독 친절했다. 그녀는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당시에도 유색인 팬들이나 유색인 국가 방문 시에도 예의 바른 태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먼로는 유명세만큼이나 굴곡진 사생활로 유명한데, 정비사, 야구선수, 당대 최고의 극작가와 결혼하고 이혼했으며, 촬영장에서 각성제와 음주를 남용했다. 중요한 촬영을 펑크내고 케네디 대통령 생일잔치에 참석해서 노래를 부르는 추문을 일으켰다. "Thank you Mr. President"라는 자작곡을 불렀는데, 속옷도 입지 않고 꽉 끼는 드레스를 입어 모두를 당황시켰다고. 이 장면은 이후 <레옹>에서 마틸다가 레옹에게 퀴즈를 내다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오마주 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그녀의 방 침대에서 나체로 죽은 채 발견된다. 공식적으로는 수면제 과다 복용에 의한 사망으로 되어 있으나, 케네디 형제와 친밀한 관계였단 사실로 미루어 보아 마피아 조직이 개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모살설도 남아있다.







02.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1929 ~ 1993, 영국 배우, 벨기에)


짧은 뱅 헤어,
짙은 눈썹을 강조한 화장,
유행을 타지 않는 미니멀한 옷차림



녀는 세기의 연인이며, 인간의 모습을 한 천사다. 명연기와 아름다운 외모로 명성을 떨쳤고,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영화계 은퇴 후에는 아름다운 선행을 펼쳐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천사의 이름은 오드리 헵번이다.


영화 <사브리나>에 출연하며 입은 드레스는 지방시를 세계적 패션하우스로 격상시켰다.

헵번의 데뷔는 <로마의 휴일>이었다. 그녀의 눈썹과 큰 눈을 강조한 메이크업과 단발은 '헵번스타일'이라는 아이콘이 됐다. 영화 <사브리나>에서 지방시의 옷을 입어 지방시를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로 격상시킨 경력도 있다. 그녀는 유행을 타지 않는 심플한 드레스와 깔끔한 스타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시대의 연인이다.


이런 얼굴로 영화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실제로 그녀가 했던 말이다. 헵번은 10대 시절 세계 2차 대전을 겪었다. 당시의 처참한 경험 때문에 평생 전쟁 영화 출연만큼은 사사했다고. 1953년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의 여주인공 앤 공주 역으로 발탁되며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로마의 휴일은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평소의 일상에서 벗어나 평범한 여성과 한때를 보낸다는 구성으로 훗날에 만들어진 신데렐라 스토리의 역발상이다. 이런 플롯은 이후 세대의 영화나 방송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섭 카쉬가 찍은 오드리 햅번. 심플한 의상과 단정히 질끈 묶은 머리가 아름답다


헵번은 철저한 식단관리와 식이요법으로 꾸준히 마른 몸매를 유지했다. 그러나 초콜릿을 사랑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헵번은 10대 시절 영국에서 발레를 배우다 2차 세계대전이 심화되자 나치의 독일 치하 네덜란드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그녀는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했다. 몸무게가 39kg이 될 정도였고, 튤립 구근을 먹으며 생을 연명했다. 그렇게 죽기 직전에 네덜란드 병사가 준 초콜릿을 먹고 아사를 모면했다. 이후 헵번은 초콜릿을 사랑하게 됐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인해 생긴 다크서클과 마른 몸매가 그녀의 미적 상징이 됐다.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의 첫 주연작이지만 영향력은 엄청났다. 영화를 본 그레고리 펙(남자 주인공)이 자기 이름만 크게 나온 포스터를 보자, "헵번이 오스카를 탈 게 분명한데, 내 이름만 포스터에 나오면 사람들은 나를 쪼잔하다고 비난할 거다"라고 말하며 포스터에 그녀의 이름도 같은 크기로 넣으라고 파라마운트사에 요청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헵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헵번은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오드리 헵번은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감독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에서 여주인공을 맡으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른 아침 검은색 선글라스, 드레스를 입고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의 쇼윈도 앞에서 커피를 들고 도넛을 먹는 모습은 그녀를 시대의 아이콘으로 격상시켰다.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에서 맡았던 홀리 골라이틀리(Holly Golightly) 처럼, 헵번이 맡은 캐릭터는 순진무구함으로 세상에 때에 찌든 남자들을 변화시키는 여성상인 경우가 많았다.


티파니 에메랄드 색이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는 단연코 헵번이다

헵번은 평소에는 매우 검소해서 아이들에게 밤새 동화책을 읽어주고 직접 밥을 해주고 빨래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사치도 하지 않았다. 스위스로 이사를 갔을 때는 허름한 옷을 입고 직접 짐을 날랐고, 협찬받은 의상은 모조리 반납했다. 예쁜 재규어 승용차가 갖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가족이 다 탈 수도 없고, 장보러 갈 때 쓰지도 못한다며 끝내 사양했다.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의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인도주의적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에서 아이들을 도왔다. 1992년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에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한 것이 유명하다.


흡연으로 인한 결장암으로 1993년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




헵번은 영화계 은퇴 이후 유니세프의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인도주의적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에서 아이들을 도왔다








03. 엘리자베스 테일러 (Elizabeth Rosemond Taylor, 1932 ~ 2011, 영국/미국)



미의 화신(The Beauty Incarnate)
- 뉴욕타임스


그녀는 철저한 노력파였고, 외모가 자신의 연기를 가리지 않길 원했다. 에메랄드 색 눈동자는 그녀의 아이콘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할리우드 여신들(비비안 리,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케서린 헵번) 중 한 명이다. 1942년 열 살에 배우로 데뷔했으며, 2차 세계대전 때 일가족이 미국으로 귀국했다. 2001년까지 50편의 영화에 출연한 다작 배우로 유명하다. 영화 <클레오파트라>로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고,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등으로 유명하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두 번, 골든글로브 네 번, 영국 아카데미 두 번에 수상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당신이 예쁘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연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웨이트리스가 될 뿐이다. 당신은 절대로 존경받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철저한 노력파였고, 외모가 자신의 연기를 가리지 않길 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미모를 칭송하기 바쁠 때 그녀는 칭찬에 취하지 않고 자신을 연단했다.


영화 <모던 스크린(1948)>년의 포스터, 이영애의 <친절한 금자씨> 포스터가 이 장면을 오마주했다

그녀는 8번의 결혼식을 올렸다. 힐튼 호텔 경영자의 아들인 콘래드 니키 힐튼 주니어와의 첫 결혼을 시작으로 친구의 남편이었던 에디 피셔와 결혼과 결혼했을 때가 네 번째였다. 리처드 버튼이 테일러에게 선물한 33캐럿 다이아몬드 반지가 유명했다. 현재 반지는 국내 기업인 이랜드가 101억에 낙찰받아 보관 중이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필요로 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 뿐이었다.


마이클 잭슨과 절친한 친구사이며,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어서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원래는 취임식 때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암투병 때문에 방문이 무산됐었다. 그녀는 1999년 대영 제국 훈장 2등급을 받았고, 2011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속의 반지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다섯 번째 남편인 리처드 버튼에게 선물 받은 것이다. 33.19 캐럿의 다이아모든 반지는 현재 이랜드가 101억에 낙찰받아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보라색 눈동자로 유명하다




04. 그레이스 켈리 (Grace Patricia Kelly, 1929 ~ 1982, 미국)




상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그레이스 켈리는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모나코의 공비(公妃)가 됐다. 그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그녀는 1952년 서부극 영화 <하이 눈>에서 게리 쿠퍼의 상대 역으로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였다. 바로 다음 해, <모감보>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때의 계기로 앨프리드 히치콕 눈에 들었다. 히치콕은 켈리와 함께 <다이얼 M을 돌려라>와 <이창>을 제작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순진하고 청순한 이미지였던 켈리는 우아하고 침착한 냉미녀의 이미지를 얻었다.





그레이스 켈리는 설산(雪山) 같아.
그런데 그 산이 화산이야.
- 앨프리드 히치콕


결혼 전 켈리는 화려한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이란의 왕 팔레비 2세, 게리 쿠퍼, 윌리엄 홀덴 등의 남자들과 염문이 났고, 러시아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올렉 카시니의 아이를 임신해 결혼까지 약속하지만,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끝날 것을 두려워하여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하고 낙태를 한 적도 있다.


히치콕의 영화 <나는 결백하다>를 찍던 중, 화보 촬영차 모나코에 들렀다가 모나코 공(公) 레니에 3세가 켈리를 초대한다. 이후 레니에 3세는 12캐럿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등 켈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속적인 구애를 펼쳤다. 1956년 레니에 3세와 켈리는 무려 일주일 동안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런 와중에 그녀가 2달러를 선물 받은 뒤 레니에 3세와 결혼하게 됐다는 소문이 퍼졌고, 2달러는 행운의 지폐가 됐다.


그녀가 2달러를 선물 받은 뒤 레니에 3세와 결혼하게 됐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2달러는 행운의 지폐가 됐다.


그러나 세기의 결혼 이후 그녀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모나코에서는 주로 프랑스어를 썼는데 켈리는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했다. 언어뿐만 아니라 공비로서 엄격한 규칙이나 지켜야 할 전통은 그녀를 옥죄었다. 시어머니, 시누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시집살이를 했고, 남편 레니에 3세는 모나코 내에서 켈리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금지했다. 켈리에게 자유는 없었다.



1982년에 차녀 스테파니 공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자가로 프랑스에 가던 중 켈리가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면서 차가 산비탈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가 났다. 같이 타고 있던 스테파니 공녀는 가벼운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지만 켈리는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녀는 사고 다음 날에 사망했다.


그녀는 허무하게 스러졌지만 그레이스 켈리는 자타공인 50년대 할리우드의 전설적 배우였으며, 신데렐라 그 자체였다.





다음 편에 계속.


Special Thanks to: <美人> 서울미술관, <Den> no.60, bizkitz, SweetGayBar, jayjin, mue's blog, AFI(American Film Institute) Top 50 Femal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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