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가르보 / 잉그리드 버그먼 / 올리비아 핫세 / 나탈리 우드
이 글의 시작은 단순했다. 이제는 전설이 된 그녀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획 후 리스트를 선정하는 데는 꽤나 애를 먹었다. 혹시나 이름을 기억 못한 세기의 미녀가 있을까, 누락된 정보가 있진 않을까 걱정했다.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리스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리스트는 칭찬의 나열보단 존경과 헌사(tribute)의 목록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이 그 맥을 계승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영화는 그녀들을 기록했고, 반대로 그녀들은 영화를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여배우를 나열한 것은 외모지상주의라기 보단 미의 추구에 그 의도가 가깝다. 예술은 이성보다 생존에 가까운 본능이다. 미의 추구는 곧 생존의 추구다. 그 시절 우리의 아이콘이자 여신들을. 배우로서 당당하게 자신을 산화하고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들을 만나 보자.
고혹적인 눈빛을 가진
스웨덴의 스핑크스
그레타의 신비롭고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별명이다. 그녀는 14세에 아버지를 잃고, 백화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리던 중 모델 일을 시작했다. 스웨덴 드라마 스쿨에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다가 MGM과 계약을 맺고 1926년에 할리우드에 진출한다.
그레타는 171cm의 큰 키와 금발, 푸른 눈, 그리고 차가운 얼음 같은 미모로 미국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그녀는 이내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과도기를 이끌었던 전설의 여배우가 된다.
은막(Scilent Movie)의 여신
그레타는 영화 <안나 크리스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그랜드 호텔>, <안나 카레니나>, <퀸 크리스티나>에 출연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랜드 호텔>은 웨스 엔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호텔 스토리의 전형적인 플롯을 따르고 있기에 여기서 원류를 찾긴 어렵다. 굳이 플롯에 연결고리를 대자면, 호텔과 투숙객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영화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작품성이나 연기력의 아이콘이라기보다 영화 역사의 계승과 아름다움이 가지는 상징성이 큰 배우다.
그레타는 명예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돌연 배우 생활을 은퇴한다. 이후 독신주의로 평생을 살았다. 소문에는 레즈비언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스캔들 상대는 같은 스웨덴 출신 배우인 미미 폴락이었다. 그녀의 성격만큼 신비로운 루머다. 스웨덴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를 추모하며 자국 지폐(100 크로나)에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레타 가르보는 1990년 4월 15일, 뉴욕의 자택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스웨덴이 할리우드에 준 선물
대중들은 잉그리드 버그먼을 <카사블랑카>로 기억할 것이다. 카사블랑카 이전, 그녀는 스웨덴과 독일 영화를 전전했다. 1936년, 그녀는 <간주곡>이라는 작품을 계기로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의 러브콜을 받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1943)>의 영화화 때는 헤밍웨이가 직접 그녀를 지명하기도 할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이후 앨프리드 히치콕과 여러 영화를 찍었으며 1944년 <가스등>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버그먼은 이내 그레이스 켈리와 함께 히치콕의 두 뮤즈 중 한 명이 된다.
그녀는 데뷔 전 코가 너무 크다고 성형을 권유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자신은 자기 코가 마음에 든다며 끝내 고치지 않았다. <잔다르크>를 연기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연극과 영화 각각 두 번. 잔다르크를 총 네 번 연기했다. 이후 수많은 영화계 후배들이 잔다르크를 연기했지만, 그녀를 능가한 잔다르크는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버그먼은 히치콕이 매우 아끼고, 미국이 사랑하는 배우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영화감독인 로베르트 로셀리니 감독과의 열애로 배우 경력 초유의 위기를 맞는다. 버그만이 로셀리니의 작품을 보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것이 시초였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로셀리니 씨, 당신의 영화 <무방비 도시>와 <전화의 저편>을 봤습니다.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그녀는 영어는 아주 잘하고, 독일어는 아직 잊지 않았고, 프랑스어는 썩 잘하지 않고, 이탈리아어는 오직 '당신만을 사랑해'만 알고 있는 배우인데요, 저는 당신과 함께 일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잉그리드 버그먼.
(출처 씨네 21, 한창호, 13/07/05)
이탈리아 남자인 로셀리니가 편지에 담긴 속 뜻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버그만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며 즉각 답신을 보냈고, 버그먼은 이탈리아로 날아간다. 앨프리드 히치콕은 로셀리니와 열애를 하고 리얼리즘 영화를 찍는다며 할리우드를 떠난 그녀를 다신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자신들의 연인을 이탈리아에 뺏긴 미국 관객들의 반응은 히스테리컬 했다. 버그먼에게 간통의 주홍글씨를 새기려 했다. 결국 할리우드는 버그만을 외면했다. (히치콕의 배역과 사랑 때문이긴 했지만) 그녀는 당시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계승해야만 했던 청순하고 순결한 여성의 이미지를 스스로 깨버린 최초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파격적인 연기를 했으며 많은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팜므파탈이었다.
1982년, 잉그리드 버그만은 자신의 생일에 친구들과 파티를 마친 후 조용히 세상을 등졌다. 향년 67세의 일이다.
원조 줄리엣.
올리비아 핫세는 1964년 영화 <더 크런치>로 배우로 데뷔했고, 4년 뒤 그녀에게 불멸의 영예를 안겨준 <로미오와 줄리엣>에 출연한다. 이때 그녀 나이는 불과 17살이었다. 바로 다음 해인 1969년, 핫세는 줄리엣으로 골든글로브 여자 신인상을 수상한다. 영화는 지금 봐도 지루하지 않은 수작이다. 그녀는 이후 여러 작품에 출연했지만 과거의 영광(줄리엣)을 뛰어넘진 못했다. 핫세의 필모그래피 설명이 부실한 이유다. 그러나 그녀는 '줄리엣' 이미지 하나만으로 명실공히 세기의 아이콘이 된다.
핫세는 <부활의 날>이라는 일본 영화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일본인 엔카 가수였다는 게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이다.
핫세는 한국 나이로 21세에 결혼하는데, 첫 번째 남편 딘 폴 마틴의 프러포즈를 받은 스토리가 흥미롭다. 핫세는 지금으로 따지면 '베이글녀' 종결자였다. 순수한 얼굴에 굴곡진 몸을 가졌기에 뭇 남성늘의 시선이 아래로 쏠리기 일쑤였다. 폴 마틴은 핫세가 눈을 보여주지 않고 "내 눈동자 색깔이 뭐죠?"라고 한 질문에 유일하게 답한 남성이었다. 이 스토리는 후에 여러 영화에서 오마주 된다.
핫세는 일본인 후세 아키라와 두 번째 결혼과 이혼을 한 뒤, 1991년 가수 겸 배우인 데이비드 아이슬리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핫세는 그와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올리비아 '핫세'가 아니라 '허시'로 발음/표기하는 게 맞다. '핫세'는 일본어식의 발음(ハッセー)이 한국으로 전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시'는 허시(hussy, 헤픈 여자)와 발음과 철자가 비슷하다.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다. (네이티브 발음으로 "허시"를 발음할 수 있지 않는 한) 혹시나 핫세를 만날 일이 있다면 그녀를 "핫세"라 부르며 여유 있게 그 이유를 설명하자. "세기의 미녀에게 오해를 사는 누를 범하고 싶지 않다"고. 혹시나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말이다.
비운의 미녀배우
나탈리 우드는 러시아계 이민자인 부모님 아래서 자랐다. 그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배우의 길을 걸었다. 1943년, 우드는 5살의 나이에 카메라 앞에 섰다. 아역배우로 계속 영화를 찍은 그녀는 <34번가의 기적(1947)>이란 영화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이후 지속적인 영화 활동을 하던 중, 영화 <이유 없는 반항(1955)>에서 제임스 딘과의 열연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는다. <이유 없는 반항>은 그녀에게 최우수 여우 아카데미 수상 후보로 지명되는 영광을 주었고, 아역에서 성인 연기자로의 변신을 성공시켰다. 그녀는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1961)>에도 출연하며 연극/영화의 장르를 가리지 않는 열정을 보였다. 이후 <잔디(1962)>와 <적절한 낯선 자와의 사랑(1963)>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최우수 여배우 상을 받는다.
1970년, 나탈리 우드는 단 두 편의 연극에 출연하며 잠시 두 아이의 어머니로 돌아간다. 이후 배우인 로버트 와그너와 결혼한 후, 이내 이혼했고 리처드 그레그슨과 재혼했다.
나탈리 우드는 43세에 캘리포니아의 산타 카탈리나 섬 근처에서 익사했다.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요트에서 떨어져 실족사했다. 법원은 사망 원인을 사고사로 판명했다. 그러나 2011년 법원은 새로운 진술을 바탕으로 타살 가능성을 인정한다. 요트 선장이었던 데이븐이 법정 앞에 섰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드의 남편이 그녀가 사라졌을 때 "그녀를 찾지 마라"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두 부부가 막 다툰 직후였으니 보트든 뭐든 타고 돌아가지 않았겠냐는 말과 함께. 이런 남편의 발언에 나탈리 우드의 동생은 "물의 검은 부분만 봐도 몸서리치는 언니가 어떻게 혼자서 보트를 탈 수 있느냐"고 항소했지만 타살이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타살과 자살 사이에서 수사를 재개하던 법원은 그녀의 사망 원인을 '원인 불명'으로 바꿨다.
나탈리 우드는 언젠가 촬영 장소에서 익사의 위험을 겪은 적이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녀는 그 이후 극심한 물 공포증을 겪는다. 그런 배우가 그렇게도 두려워하던 장소에서 생애 마지막을 맞았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죽음이다.
다음 편에 계속.
Special Thanks to: <美人> 서울미술관, <Den> no.60, bizkitz, SweetGayBar, jayjin, mue's blog, AFI(American Film Institute) Top 50 Female St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