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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Mar 15. 2016

종말론, 01

소고 단편선

지은이는 2012년에 이 단편을 완성했다. 당시엔 '갈 길이 먼 20대'라고 자신을 소개했었는데 눈 깜짝할 새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 소설은 잠시 세상에 나왔다가 눈을 감은 토막이다. 파일로 저장되어 있었기에 글 위로 먼지가 쌓이진 않았지만 문장은 옛 것이었다. 문장을 만졌다. 오자를 정정했다. 당시엔 삽화가 없었다. 4년 전 작가는 사진을 찍는 취미도 없었고, 미술 이론에 빠져 사느라 작가를 많이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지금은 삽화를 좀 넣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삽화는 대부분 만(Jeremy Mann)의 것이다. 4년 전 적었던 서문도 작품의 일부다. 그래서 여기 그대로 옮겨 적는다.


작가는 아직 꿈 많고 갈 길이 먼 20대다. 어느 날 계속해서 팩트만 쓰고 앉아있다 보니 사람들이 세상에 흘러 다니는 정보를 쫓느라 점점 더 딱딱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종말론은 그렇게 탄생한 첫 단편이다.

2012년 8월 9일, 소고 지음



1장



2011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5! 4! 3! 2!1!  해피 뉴 이어!!"


새해가 밝았다.


나는 지금 원룸 바닥 아무렇게나 펼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다. 왼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손바닥만 한 화면에는 아프리카 별창(온라인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비속어)이 생글생글 웃고 있다. 나는 가난한 자취생이다. TV는 공부를 핑계로 들여오지 않았다. 그러나 보신각 대신 별창이다. 패배자 인생은 천재성과 같이 스스로 드러나나 보다.


2012년이다. 내가 알기론 마야인인가 수드라인가가 올해를 지구 종말의 해라고 예언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열어보았다. 하늘은 캄캄했다. 하긴. 서울 하늘은 이제 운석이 떨어져도 보이지 않을 만큼 탁하다. 나는 다시 창문을 닫았다. 몸은 철퍽하고 이불 위로 쏟아졌다.


The Alley, Jeremy Mann

생각해보면 밀레니엄에도 그랬다. 뉴스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컴퓨터가 멈출 거라고 했다. 앵커는 2000년이 되면, 그 숫자를 2진법으로 저장할 공간이 모자랄 거라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원시시대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끊임없이 종말을 제기했었다.


밀레니엄이 오기 1년 전.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우리 집엔 486 컴퓨터 한 대가 있었다. 아버지가 사다 준 것이었다. 명석하게도 1999년의 나는 종말(終末)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세계의 끝. 어두움의 세계가 열린다.'같은 상상을 했다. 열 살이 채 안 되는 나이의 아이에게 종말이라는 단어는 세상 어느 것보다 훌륭한 장난감이었다.


부모님을 졸랐다. 오늘만큼은 늦게까지 TV를 보고 싶었다. 당신은 웬일인지 12시까지 컴퓨터를 켜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당신의 한 달 월급. 그 절반이 넘는 최신 기계가 밀레니엄 소식과 동시에 파괴될 것이라는 언론의 보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식이 밤 한 번 넘겨보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이었을까. 지금도 그때의 물음엔 답을 할 수 없다. 그분들께 예외란 1년에 한 번쯤만 허락하는 것이다. 어찌 됐건 나의 해넘이는 1999년 12월 31일에 처음 허락됐다. 그리고……. 5! 4! 3! 2! 1!!!


당연한 말이지만, 31일 11시 59분 59초에서 2000년 1월 1일이 되기는 단 1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1초는 내가 수도 없이 보냈던 다른 1초들과 하나도 다를게 없었다. 애석하게도 원시 시대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가우가"는 밀레니엄의 표준 인사법이 되지 못했다. 정신을 다잡았을 때, 컴퓨터는 태연하게 1월 1일 00시 0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J야, 이제 그만 자야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제 방 침대를 향해 슬리퍼를 질질 끌었다.


나는 잡생각을 추억하는 동시에, 별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잡히지도 않을 두 존재를 동시에 복기했다. 현실은 0시 6분이다. 2012년 역시 특별할 게 없다. 이렇게 또 시작이다. 마야 사람들도 그렇고, 노스트라다무스도 그렇고 전부 엉터리 작자들이다. 오지도 않을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며 책장사를 한다. 다시 생각해봐도 질이 나쁜 녀석들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 놈들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재물이나 먹을 것을 그들에게 헌사했겠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그네 추종자들은 좀 모자란 사람들인 것 같다. 자기들이 맞이하지도 못할 년도의 세계를 예언한 사람을 믿고 앉았다니. 그리고 그걸 꼼짝없이 기록해 주었다니.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세상에는 생각보다 멍청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 정도다. 이런 멍청이들을 잘 구워삶아서 떵떵거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이불이라는 그물에 얽혀있는 물고기 한 마리다.


나는 이런 거품 같은 상상에 꼬리를 물려나가며 BJ의 <해피 뉴 이어> 방송을 보고 있다. 새해가 되기 짧은 새, 사람들이 엄청난 양의 별풍선(인터넷 방송 화폐)을 그녀에게 쏘았다. 2012개의 별풍선이 두 번이나 터졌다. 20만 원 곱하기 2라……. 40만 원 쫌 되는 금액이 1분 만에 2012년 그녀에게 송금됐다. 듣기론 저 별풍선을 쏘는 녀석은 고등학생이라 했다. 무슨 생각으로 부모님 등골을 다 빼먹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저 '예쁜이'가 너의 떡진 머리를 손수 쓰다듬어주는 것도 아닌데. 이쪽도 골 빈 애들 천국인 것 같다. 노스트라다무스 시절만큼 멍청한 종자들이 여기서 별풍선이나 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선동자들과 그 뒤를 따르는 멍청한 추종자들 이야기가 여기서도 이루어지는 중이다.


아, 물론 나는 제외다. 나는 그냥 '예쁜이', 쟤가 좋다. 그녀가 물리적으로 나를 향해 뭔가 해줄 리는 없다. 그러나 화질 떨어지는 화면으로 애교질을 해 대는 모습은 TV에 나오는 연예인들보다 3배 정도 좋다. 연인과 화상통화를 할 수 있다면 이런 기분일 거다. 나는 딱 여기까지다. 예쁜이의 가방이 되고, 구두가 되어줄 풍선을 갖다 바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쟤는 허상이고, 모니터 앞에서 혼잣말을 하는 철없는 아가씨다. 냉철한 나는 그냥 철없는 너를 즐기는 중이다.


멍하니 생각에 취해있는 와중에 예쁜이의 말이 나를 깨웠다.


"그런데요, 마야인들이 말한 2012년 종말이 1월 1일인가요? 우리들. 모두 멀쩡하네요?"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인 걸까? 방금 내가 생각하던 것과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흐트러진 집중력이 잠시 돌아왔다. 갑자기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간다. 아는 척 좀 하는 사람들이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부하는 속도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쭙잖은 지식으로 그녀의 마음을 얻어보고자 초당 800타쯤 되는 속도로 뻐꾸기를 날리고 있었다.


선수는 매니저가 두었다.

"예쁜 씨, 종말은 제가 알고 있기로 1월 1일이 아니고요. 그 날은 2012년 12월 21일이에요."


"그래요? 그렇구나." 그녀가 대답했다.


매니저란 놈은 1년 전부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 키보드를 놀리기 시작한다.

키보드계의 스티브 잡스, 여기 강림했다.


"네, 마야인들은 지구 정화설이라는 것을 믿었는데요. 신이 인류가 자연을 더럽게 쓰는 것을 정화한다는 것을 믿은 학설이라고 해요. 원래 이 멸망은 총 세 가지 차례로 구성되어 있어요.


우선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1차 멸망이 있고, 노동을 착취당한 동물들이 인간에게 보복한다는 2차 멸망이 있어요. 첫 번째 멸망은 마야 문명이 종말을 맞던 시기와 비슷하게 일어났다고 하고요.


두 번째는……. 잘 모르겠네요. 어찌 됐건 이 두 가지는 이미 지나갔어요. 그리고 마지막 3차 멸망이 2012년 12월 21일. 그러니까 올해 일어난다는 멸망이에요. 이 것은 기계로부터 시작된다고 해요. 인간들 자신이 사용하던 기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이죠. 자세한 내용은 이 이후의 내용이 훼손되는 바람에 밝혀지지 못했다고 해요."


인디아나 존스가 조선에 강림한 줄만 알았다. 참 대-단한 정성이다.


예쁜이는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꼭 점수 따려고 아는 거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 자랑하는 놈들이 있다. 해박한 지식과 아는 척은 딱 반 발자국 차이다. 조심 좀 할 것이지. 예쁜이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화제를 돌렸다. 다음은 빤한 노닥거리다. 향수, 강아지, 악플 다는 자식 욕하기, 별풍선 많이 날려준 회원님께 윙크하기 등. 나의 새해는 예쁜이와 함께 허무하게 열렸다. 마치 1999년과 2000년 사이의 1초가 가져다주었던 허무함처럼.


나는 그녀가 방송을 종료하는지 어쩐지 기억도 하지 못한 채.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엎드린 자세로 잠이 든다. 작년 새해에도 이 자세였던 것 같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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