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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Mar 17. 2016

종말론, 02

소고 단편선

[1편]에서 이어짐




타지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럴까? 아니면 나만 이렇게 게으른 것일까? 나는 방학을 맞았지만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다음 학기를 위해 도서관에서 공부한다고 부모님께 큰소리쳤다. 그러나 내가 눈을 뜨는 건 열두 시. 그마저도 배가 고파서 눈을 뜬다. 


물론 중간에 몇 번 깨긴 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고, 이 곳엔 나를 보채는 부모님도 없다. 나는 그저 손으로 휴대폰을 더듬다가 실눈으로 시간만 흘끗 본다.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하루는 규칙적으로 무기력하다. 어설프게 점심을 챙겨 먹고 잠깐 바람을 쐬면 어느새 한 시다. 후회와 통탄 그리고 자학의 시간이다. 방 안에 널브러진 컵라면 용기와 아무렇게나 세워진 생수병, 발바닥에 걸리는 머리카락이 스스로를 더욱 무력하게 만든다. '나는 정말 쓰레긴가' 하는 생각을 열댓 번, 그리고 반성의 몸부림을 열여섯 번, 그리고 이렇게 바보같이 하루를 시작하면서도 주린 배를 움켜쥐는 자신에게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하는 조롱을 한 번 더 추가한다.


Birds eye view, 91x116cm, 류주현, 2015


타지에서 맞는 방학은 외롭다. 서울 친구들은 학교 다닐 땐 학교 사람들이랑 놀다가, 방학이면 그네들 중·고등학교 동창들과 논다. 타지인은 그 개체가 많지 않다. 어쩌다 맞는 약속은 언제나 반갑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감정에도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곳이다. 약속의 성사와 취소는 나의 의지보다 주머니가 결정할 문제다.


"철컹.자판기에서 음료수가 떨어지는 소리다. 자책은 이쯤 해두도록 하자. 나는 멍하니 겨울 햇살을 만끽하고 있다. 도서관을 가야겠다. 그리고 저녁에는 A형을 불러서 삼겹살을 먹어야겠다. 방학이 되면 짧게는 이틀, 길게는 일주일 가량을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편의점 아저씨와 간간이 나누는 "안녕하세요. ", "많이 파세요."는 대화라 할 수 없다. 오늘은 꼭 A형과 만나서 수다를 떨어야겠다.


해가 중천에 걸린 시각. 나는 헉헉대며 도서관에 도착했다. 가방 안에는 전공책 한 권이 들었다. 오늘은 꼭 읽어야지 하고 아침에 찔러 넣었다. 그래도 개요(introduction)는 읽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젠 3장을 읽을 차례다. 개강까지 한 달. 일주일에 두 장씩 보면 다 볼 수 있는 양이다. 원래는 두 권이 목표였지만 인간미 있게 한 권은 포기했다. 오늘은 늘 앉던 자리가 아니라 조금 더 깊숙한 곳을 찾아보기로 한다. 어차피 시간은 많고, 공부는 내가 원하는 자리에서 해야 잘된다.


2관 4층. 공부하기 최적인 장소다. 여기에는 자연과학, 공학부 장서가 있다. 쓸데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매혹적인 책 제목에 정신 팔릴 가능성이 없다.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방학은 방학이다. 나는 이내 자리를 잡았다. 공부를 시작했다. 밥을 먹어서 그런가? 난방을 잘해서 그런가? 아니면 도서관까지 가는 길이 멀었나? 눈꺼풀이 무겁다. 한 숨 자고 시작해야겠다.






개강이 돌아왔다. 이 녀석의 학교는 방학 중엔 가고 싶고, 공부가 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막상 다니기 시작하면 휴학(가끔 자퇴)을 꿈꾸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에게 그곳에 다시 가기 싫은 이유를 대라고 하면, "내가 그 짓을 또 해야 하냐?"고 한다는데. 지금 내가 딱 그렇다. 나는 앞으로 며칠 밤을 더 새울 것이다. 벼락치기를 할 것이고, 비타민 음료를 책상 위에 쌓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되는 고난의 대가로 제자리인 학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짓을 반복하기 위해서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한다. 스스로 여는 지옥의 문이다.


인간은 상상력의 동물이라고, 이쯤 되니 수업에 들어가는 게 꼭 연옥에 가는 것만 같다. 처음 첫 주야 재밌다. 무슨 과목이든 처음에는 다 알아들을 수 있다. 수지와 수현의 건축학개론처럼 버스 타고 돌아다니고, 사진 찍고, 답사 가고 하는 것들은 잠깐 혀끝에 떨어지는 스포이트 설탕물이다. 잠깐이다. 개요와 학습 목표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은 개강 3주 차쯤부터 바람에 모래성 날리듯 샅샅이 흩어진다.


그뿐이 아니다. 나는 분명 똑바로 수업을 듣고 필기를 한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면 교수는 더 이상 학생들의 언어로 강의를 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하여 저기 앞자리에서 앉아 고개를 끄떡거리는 녀석 중 절반 이상이 앞으로 그럴 것이다. 다른 대학교 어떤 교수는 한 학기에 절반이 넘는 학생들에게 F를 때린다는데, 나도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 교수에게도 책임이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 학생의 눈높이도 좀 맞출 줄 알아야 한다. 애들이 공부를 안 하는 이유는 자유와 유혹이 아니라 대화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 하는 것보다 못하는 거다. 그게 그건가? 나는 손바닥 위로 턱을 괸다.


1년 뒤면 대학원이든 직장이든 가야만 한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쉬운 과목, 학점 잘 채워주시는 교수님을 찾아 귀동냥, 족보 동냥, 정보 동냥을 해서 여기까지 왔다. 나는 지금 교수님의 판서를 받아 적으며 열심히 헤드뱅잉을 하지만 수업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를 반복적으로 묻는 중이다. 정말로 나는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앉아있는 것일까? 나와 교수가 서 있는 칠판 사이에서 안드로메다가 느껴진다. 교수는 이제 막 학생의 언어를 떼려는 중이다.





4주 차의 금요일, 불타는 금요일이다. 불은 금요일에 옮겨 붙었지만 이제 중간고사를 대비해야 한다. 현재 시각 16시 45분.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다. 몸은 석양을 등에 지며 무거워진다. 순댓국이나 한 그릇 먹어야겠다. 그리고 열람실에 가야지. 


"카톡.

A형의 메시지다. 


미팅을 하나 잡아놨단다. 내가 필요하단다. 나는 머리도 식힐 겸. 새로운 친구도 사귀고 싶었다. 내가 원한 대학 생활은 열람실 속에 있지 않았다. 고민할 것도 없다. 나는 좋다고 답했다.


La dance I, 앙리 마티스, 1909


"시체가 벌떡! 시체가 벌떡! 벌떡 벌떡 벌떡 벌떡!"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아…….


벌써 나이를 먹었나. 애기들 순발력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그래도 내 옆자리 앉은 애가 귀여워서 인상이 찌푸려지지 않는다. 나란 녀석도 천상 남자인가 보다. 이번엔 질 수 없다. 술을 잘 마시는 모습은 멋져 보일 수 있겠지만, 순발력이 달려서 벌주를 마시는 모습은 꼴사나워 보일 테니까. 자, 다시 가자. "랜덤게임, 랜덤게임!"


그렇지, 옆자리 귀요미가 걸렸다. 귀요미는 커다란 눈망울에 굴곡 없는 일자눈썹이 똑 몰티즈를 닮았다. 내 스타일이다. 새치름하게 앉아있는 것이 매력 있다. 난 이런 애들이 좋…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얼른 마셔야지 마셔.


강아지는 곤란한 눈빛을 우리에게 보내지만, 먹혀들 리 없다. 귀엽게 낑낑대는 모습이 통하는 건 너의 집 문턱 까지란다, 아가야.


내 시선을 느낀 걸까? 강아지의 눈빛이 갑자기 변했다. 

"탁." 

그녀는 눈앞의 컵을 바닥까지 비웠다. 맥주 거품이 벽을 타고 내린다. 의외네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 숙인 고개를 가누지 못한다.


미팅의 묘미는 인사불성인 아이가 나오는 순간이다. 우리는 각자 번호를 교환했다. 나는 나름 젠틀하게 술집을 나왔다. 우리는 "이런, 어떻게 해요?", "택시 잡아드릴까요?"의 멘트를 날렸고, 상대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희 지하철로 갈게요.", "즐거웠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말을 주고받았다. 사실 미팅에서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그냥 두어도 지나가는 시간을 함께 태울 수 있다는 것. 그게 미팅의 진짜 묘미가 아닐까. 미팅의 끝은 그래서 더욱 허무하고 또 아쉬운 걸지도 모른다.


"띵띵"

문자다. '강아지'라고 저장되어 있다. 


그녀가 인사불성이 되기 전. 교환했던 번호다. 술김에 "너, 개 닮았다"며 '강아지'라고 농담을 했었다. 나도 취했나? 오타 때문에 두어 번 문장을 고쳤다.


이대로 그녀를 그냥 보내긴 아쉽다. 그녀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우연히 잡지에서 읽었던 문장이 생각났다.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답장을 할 땐 속으로 정확히 열을 센 뒤 문자를 보내세요.'라고. 꼬박 열을 셌다. 도와줘요 맥심.


문자를 보냈다. 

'저도 오늘 즐거웠어요. 괜찮으시면 한 번 더 뵙고 싶어요.'라고.


무심한 듯 보이지만 사실 문자를 쓰는 내내 엄지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그런데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답장은 오질 않는다. 나, 까였구나.


아무 말이 없는 그녀와, 취기로 각성된 나의 대뇌는 눈을 감아도 나를 팽팽 돌렸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불 위로 몸을 쏟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꺼풀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가웠다.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실눈을 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휴대폰을 켰다. 시간을 보려고 했는데 문자가 하나 도착해 있다. 


'어제 제가 실수한 건 없나요? 너무 죄송했어요, 오빠. 언제 시간 되세요?'


그녀다. 아지.

좋다. 2012의 출발이 나쁘지 않다. 맥심 땡큐.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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