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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Aug 06. 2016

종말론, 05

소고 단편선

[4화]에서 이어짐. 

[첫화] 보기.





2장


"띠디디딕 띠디디딕 띠디디딕.."

그녀와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 열두 시. 시계 알람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확하게 열두 시에 울린다. 얘는 처음 아지에게 선물 받을 때부터 줄곧 이랬다. 알람을 끄고 싶었다. 그렇지만 잘못하면 고장이라도 날 것 같은 불안감과 성가심 때문에 여태껏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밤 열두 시에 딱 한 번 울릴 뿐이니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일도 없다는 합리화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지금으로선 알람을 끌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게다가 가끔은 나도 모르는 사이 하루를 넘겼는지 어떤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해주니, 가끔은(정말 가끔은)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녀에게 시계를 선물 받은 뒤, 나는 이 시계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착용했다. 학생이라 정장용 시계가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시계 테두리에 당당하게 적혀있는 'Water proof 100m'(방수 100m)라는 말이 일상생활에서 시계를 벗지 않아도 됨을 든든히 보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시계를 풀어버리기로 했다. 지금은 걷는 자체만으로도 짜증이 치미는 한여름 도심 복판일 뿐 아니라, 아지와 술까지 한 잔 한 탓이다. 몸에 걸쳐 있는 모든 것이 스트레스다. 나는 귀찮음을 섞은 몸짓으로 시계를 푼 뒤 시계 뭉치를 주먹으로 쥐고 사람 숲 속을 비집으며 집으로 간다.


오늘 만남이 잘 풀리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만남은 평소처럼 행복했으며, 갈등이나 분쟁, 이별의 씨앗 같은 것은 징후조차 보이지 않았다.(술사가 거짓말을 했다) 다만 내가 좀 불편했던 건, 비염으로 킁킁거리며 막힌 코를 끊임없이 만져야 하는 나의 상태와 냉방병이 걸릴 정도로 알딸딸한 실내온도, 마지막으로 지금 그 실내온도와 현격히 차이나는 열섬 현상의 중심부를 내가 가로질러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칵테일을 두 잔 비웠을 뿐인데 오늘따라 감각은 빳빳이 고개를 쳐들었다. 실외기에서 발생하는 온풍과 자동차 배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피부 진피층으로 속속들이 침투하고 있다. 딱히 땀이 날 정도의 온도는 아니지만 이런 더위는 자연 발생적 더위와는 달라 텁텁한 성질을 내장하고 있어서, 걸음마다 순간이동의 욕구와 자동차 구매욕을 자극한다. 내 주변을 걷는 연인들의 표정도 썩 좋진 않은데, 오늘만큼은 그들이 다퉈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킁킁대는 코끝이 아직도 뻑뻑하다.


"가자, 가!! 히히히"

한참 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골목에서 취객 과장님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의 어깨를 부축하고 있는 것은 젊은 사원 한 사람. 딱 대리 느낌이다. 둘 다 얼굴이 빨갛고 걸음걸이가 비틀거리는 것이 거나하게 한 잔 하고 다시 상 펼 곳을 찾아 밖으로 나온 듯했다. 마포 근처만 가도 다르지만 유흥 연령대가 낮은 신촌에선 이런 취객 아저씨들을 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를 재수가 좋다고 해야 할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지.


무튼 사회인 두 명은 내 바로 앞에서 인파 물살에 합류했다. 이들은 계속 비틀거리며 걷는다. 추월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추월하려면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를 스쳐야 하기 때문에 짜증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차라리 느리게 걷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조금만 더 가면 맥도널드고, 신촌역까지 가면 집까지 가는 길은 한산한 편이니까.


사람들의 간격이 좁아서 그런지 내가 짜증 때문에 예민해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하는 얘기가 적나라하게 들린다. 우선 두 사람 모두 혀가 꼬였다.

"과장님, 다음은 어데로 모실까요?" 젊어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하하, 김대리! 이 사람아. 가긴 어딜 가. 이 시간에 뭘 더 먹느니 시원하게 물 한번 빼고 헤어져야제.." 

부장은 기분이 좋은 듯, 연신 허공에 팔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자네, 이 근처에 아는 데 있나? 우리, 얼른 갔다가 가정의 품으로 돌아갑시다! 그래야 가정과 나라에 충실한 대한민국 국민아니갔어? 푸……." 

부장이 말했다. 

"헤헤, 맞습니다 부장님! 제가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히히.. 가시죠!"


‘시원하게 뺀다…….’라. 

나는 찌는 더위에 고개를 처박고 걷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들을 쳐다봤다. 그들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욱 동물적으로 보였다. 그들의 풍기는 땀 냄새와 알코올 향기는 함께 걷는 사람마저 취하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문득 그들이 어떻게 욕구를 해결할지 궁금해졌다. 이대로 가면 분명히 번화가인데, 그럴만한 곳이 있는지. 그리고 정말 이 분들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곳을 가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들과 점점 진동수가 같아지는 발걸음. 나는 일부러 그들을 외면하며 걸었다. 그렇지만 시각을 제외한 나의 신경다발들은 그들의 대화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지가 잘 아는 데가 있습니다. 언능, 따라오십셔.. 흐……." 대리가 말했다.

"그래그래. 오늘은 자네 덕 좀 보자고!" 

둘은 이제 맥도널드 앞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은 그들과 다른 방향이지만, 내 걸음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콧김 사이로 느껴지는 내 숨결에도 이제 그들과 같은 냄새가 배어 나오는 것 같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꾸준히 걸었다. 거리는 아까보다 조금 한산해졌다. 나는 지금 본능을 향해 엉망으로 엉긴 채, 인파를 헤쳐 나가는 두 살덩이를 관람하는 중이다. 취기에 홀려 차오르는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방출하려는 두 마리 늑대. 아니, 그들은 늑대라기보다는 두 마리의 종(種) 모를 짐승 같았다. 두 사람은 엉금엉금 정신을 놓은 듯 보였지만, 분명한 목표를 향해 머리를 향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둘의 존재는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욕정의 보따리를 풀 곳을 찾아 성실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짐승이었다.

신촌역을 지났다. 거리에 수 놓인 주홍빛 할로겐 등 행렬과 네온사인 세례. 열기는 변함없이 내 피부를 짓이기고 있지만, 지금은 더위보다는 본능과 호기심 그 틈바구니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중하다. 가보지 못한 새로운 장소에 대한 궁금증. 나는 처음으로 어른들의 음지를 정면으로 관람할 수 있다는 이상한 기대감에, 그들과 머리 방향을 같게 두었다.


그들은 백화점 정문에서 다시 한 번 길을 건넌다. 나는 그들이 풍기는 테스토스테론을 따라갔다. 불 꺼진 캐논 매장, 고개를 구부정히 숙인 주홍빛 가로등. 오늘따라 지나가는 사람들의 오묘한 표정들이 모두 낯설게 느껴진다. 수 없이 걸었던 신촌오거리가 유난히 어색하다. 눈앞에는 어지러운 네온사인과 그들의 비틀거림이 한데 아우러져, 더러운 욕정의 옷고름을 풀어내고 있다. 이윽고 그들은 어느 창문도 없는 한 건물의 입구 앞에서 몸을 돌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니. 먹혀버렸다.

발정이 날대로 나있던 테스토스테론의 채취는 한 유리문 앞에서 곧장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두 살덩이들의 자취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우연히 내 앞길에 끼어들었던 때부터, 눈앞에서 사라진 지금까지의 흔적들, 대화들이 대뇌를 샅샅이 핥고 지나갔다. 이 순간, 나는 어떠한 감상도,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어떠한 예고도, 흔적도 없이 두 고깃덩어리를 꿀떡 삼켜버린 유리문 한 장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쏟아지는 주홍색 불빛과 그들의 뒤를 잇는 취객들의 행렬, 올라오는 열기와 씩씩거리며 배어 나오는 알코올 향내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 머리는 본능의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빙-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집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머릿속은 깨끗했고,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맑았지만 티끌 하나 없는 머릿속은 웅웅 거리며 어떠한 사고도 허락지 않았다. 이 순간 나는 그저 두뇌를 공명 시키는 정체불명의 소리에 팔과 발의 리듬을 맞추는 한 마리 숙주에 불과했다. 눈 앞은 바늘구멍같이 작았고, 어지러움을 토했다. 심박 수가 증가했고, 두근대는 심장소리는 내 고막을 바로 옆에서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만약 개였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 침을 질질 흘리며 얕게 끓어오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발발거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뻑뻑한 코를 훌쩍였다.


나의 세상은 점점 격양되는 듯하더니, 이내 적막에 휩싸였다. 사방이 너무나도 조용했다. 교향곡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길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기분에 굽혔던 허리를 젖혀 하늘을 바라봤다.

순간, 똑바로 되돌아오는 것만 같던 세상은 나를 엎어버릴 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그 기세가 태풍 같았다. 머릿속은 대웅전 종소리마냥 끊임없이 공명했다. 도로는 푹 꺼졌다가 솟아났으며, 음악은 절정에 다다른 듯 내 몸을 휘감고 조종하기 시작했다. 나의 팔과 다리, 온몸에서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물결에 끊임없이 휩쓸렸다. 푹 꼬꾸라졌다가 푝 하며 솟아올랐다. 나는 한 건물의 쇼윈도 뒤로 아까 그들과 같은 종의 같은 욕정의 짐승 한 마리가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 그 짐승은 한 손으로는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입가에서는 침을 뚝뚝 떨어뜨린 채, 한 팔 간격을 두고 나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아까 사라진 짐승들과는 다르게 몸을 지탱하는 꼬락서니가 위태위태하다.



[다음 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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