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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Aug 10. 2016

종말론, 06

소고 단편선

[5화]에서 이어짐. 

[첫화] 보기.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평소보다 몸이 무거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올라오는 콧등의 끈끈한 기운 때문에 나는 일어나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다행히 거울 속에서 어제 보았던 들짐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어제 그들과 같은 종족이란 사실을 지각했다. 나는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수업시간 중에도 교수의 말은 고막 바로 앞에서 맴돌다가 길을 돌아나갔다. 눈알은 힘없이 칠판의 필기를 따라 굴러다녔다. 수업이 끝나고 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도 왠지 모르게 어젯밤 일이 생각나는 듯해서, 나는 죽을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오빠, 괜찮아?" 아지가 물었다.

"어? 어……." 나는 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아지의 머리카락에선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가늘고 기다란 실몽당이, 아니, 조금 긴 단백질 뭉치를 만지는 느낌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스러웠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왠지 내 손이 내 손 같지 않았다.

 "……." 아지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 볼을 어루만졌다. 아지의 손끝이 나를 쓸어내릴 때, 나는 죄책감이 증폭되는 것 같았다.

"아지야, 내가 오늘 냉방병이 돌았는지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오늘은 일찍 들어가면 안 될까?" 

나는 내 볼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을 잡고 서서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응? 응. 그래요, 오빠.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 게 좋겠다. 헤헤." 

아지는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를 보내주려 했다. 그녀의 입은 분명 웃고 있는데, 눈이 하나도 웃고 있질 않다.


"미안해 아지야, 네가 이렇게 만나러 와줬는데……." 나는 아지에게 미안해서 아지가 입은 카디건을 여며주었다. 작은 그녀의 어깨가 오늘따라 더욱 왜소해 보인다.

"아니야 오빠. 괜찮아요. 헤헤. 그런데 나, 이번 주엔 가족들이랑 여행 갈 것 같아. 그러니까 다음 주에나 다시 얼굴 봐요." 아지는 평소엔 반말을 하다가, 가끔 진지하거나 진심을 담아 이야기할 때면 존댓말을 한다. 지금 그녀의 존댓말에선 말로는 표현 못할 거리가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오늘따라 그런 그녀의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혼자 있고 싶었다. 머리는 계속해서 지끈거렸고, 가슴 한쪽 구석은 모래주머니를 달아놓은 듯 묵직하다.


"아지야. 오빠가 바래다줄게."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지갑을 집어 올리며 말했다.

"아니야, 오빠. 오늘은 많이 힘든 것 같으니까 일찍 들어가 쉬어요. 하지만 다음 주에는 이러면 안 돼. 나 화낼 거야. 알았지?" 그녀는 이제 나를 그윽이 바라본다.

"응, 고마워 아지야……. 미안해. 카톡 할게."


우리는 커피숍을 나왔고, 서로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반대로 길을 걸었다. '나 하루 만에 이렇게 변할 수 있나' 생각했다. 나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계속 변명을 시도하다가, 이내 방어를 포기하고 집을 향해 걸었다.

스타벅스를 지나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걸어가는 중임에도 피로했다. 길은 멀고, 발걸음은 무겁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나는 아지에게 가족 여행 잘 다녀오라고 말을 못 한 게 떠올랐다. 카톡이라도 보내야 되나.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실천으로 옮기진 못하고 터덕터덕 길을 걸었다. 일찌감치 저무는 태양빛마저 내 어깨에 몸을 기댄 듯 무거웠다. 카톡은 집에 가서 보내야겠다.




오랜만에 친한 형들을 만났다. 아지랑 사귀고 난 뒤로 형들과는 처음 만나는 것이다. 족히 150일은 지난 것 같다.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기분이 좋은 것이 기분이 이상하다. 여름밤임에도 불구하고 끝물이라 그런지 바람이 선선하다. 나는 약속시간에 늦었고, 형들이 도착해있다는 고기 집으로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걔랑은 계속 잘 만나?" 찬휘 형은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응, 생각보다 잘 맞아서 탈이지. 그저께는 내가 아파서 금방 헤어지긴 했지만……." 나는 컵에 물을 따라 잔을 돌리며 말했다.

"그래? 생각보다 오래가네. 야, 그래도 외로우면 형한테 얘기해라. 형이 도와줄게, 알지?" 

옆에 앉은 진현이 형이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쥐며 말했다. 여전히 짓궂다.

"형, 그런 거 필요 없어. 형이나 잘해." 나는 웃으며 너스레를 떨며 형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오랜만에 만나도 별반 다를 게 없는 이야기들. 우리는 옛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반복하지만 그래도 옛이야기는 언제나 새롭고, 즐거우며, 유쾌하다. 하긴, 사람이 일 년 살면서 머릿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지나가는 추억의 날들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싶다. 가까이서 보면 자잘한 일들로 머리가 터져나갈 갓 같은 일상이지만, 사실 우리들이 정말로 기억하고, 추억하는 그런 날들은 그런 자잘한 고통 속에서 만나는 오아시스 같은 행복. 그렇게 넘치지 않고 감칠맛 나게 퐁퐁 솟아오르는 옹달샘의 맛과 같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먹어." 찬휘 형이 고기를 집어 내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야외에서 가로등 불빛을 조명삼아 앉아있는 우리. 익어가는 고기. 들어가는 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하늘 반, 형들 반. 행복하다.

"아, 형들은 여자 친구 안 만들어? 내가 여자 친구한테 물어봐줄까?" 내가 말했다. 찬휘 형이야 만들 수 있는데 안 만드는 거고, 나는 진현이 형의 표정을 관찰했다. 어라, 이 형 표정이 당당하다. 설마.


"설마, 형… 생긴 거 아니지?"

"뭘 또 설마야, 설마는. 야, 군대 갔다 오고 처음이다." 진현이 형은 기쁨 반, 장난 반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사진 있어? 사진 있어?" 나는 집었던 고기마저 내려놓았다.

"야, 그러고 보니 너도 네 여자 친구 사진 나한테 안 보여줬잖아. 폰에 찍어놓은 거 없어?" 진현이 형은 마치 준비라도 했다는 듯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고 있었다. 사람이 여자 친구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자신이 찰 줄이야.

"어, 나야 있지." 나는 가방 안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오, 예쁘네? 어, 그런데 잠깐만." 진현이 형의 휴대폰을 먼저 건네받은 찬휘 형의 표정이 이상하다.

"뭔데, 뭔데 그래?" 나는 휴대폰을 꺼내다 말고 찬휘 형이 들고 있는 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현이 형과 형의 여자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에이, 찬휘 형 왜 또 장난쳐. 크크. 난 또 뭔가 했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가방을 꺼내려고 했다. 갑자기 팔을 잡는 찬휘 형.

"아니, 그게 아니라, 진현이 형 옆에. 얘, 그때 네 여자 친구 사진 아니야? 그때 네가 보여준." 찬휘 형이 사진을 확대했다.


어라.


진현이 형의 뒤쪽으로 비스듬히 앉아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은, 아지였다. 비록 옆모습이지만. 분명히 아지였다.


"맞지? 아니야?"

찬휘 형이 내 팔을 다시 잡는다.

"어, 어. 맞는 것 같아. 형 이거 언제 찍었어?" 내가 말했다.

"이거? 어제 여자 친구랑 이대 앞에 있는 바에 갔다가 찍은 건데?"


내 기억에, 아지는 분명 어제 가족들이랑 주말여행을 갔어야 했다.




"가족여행 취소됐어! 오빠는 토요일부터 연락도 없더니 일요일 오후에야 사진 한 장 보고선 다짜고짜 따지고 화나 내고. 그런 오빠가 더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수화기로 아지의 당황 섞인 목소리와 짜증이 동시에 전해졌다.

"아, 그 점은 정말 미안한데, 그냥 누구랑 그 사간에 바에 있었는지 얘기해주면 되잖아. 그게 어려워? 그게 아니면 네가 아니라고 하던가! 왜 말을 안 하겠다는 건데?" 나는 조금 목소리가 커졌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게 지금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뭐? 몰라. 그걸 내가 왜 오빠한테 말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야? 오빠 나 정말 화났어! 뭐야 오빠? 내 뒷조사해?"

"아……. 아니."

머리 위에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다. 온몸의 수분이 대뇌로 빨려 올라가 증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

"끊을게. 다음에 연락하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휴대폰의 액정을 바라봤다.


‘통화시간: 37분 42, 43, 44초’


"뚜뚜뚜……."

나는 통화 종료 버튼을 네댓 번 누른 뒤, 휴대폰을 침대 위로 홱 던져 버렸다.


"띠디디딕.. 띠디디딕... 띠디디딕..."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아지가 선물해준 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아...

씨발.'


나는 무작정 옷을 챙겨 입고, 지갑 하나에 이어폰을 귀에 꼽고 집을 나섰다.



[다음 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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