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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Aug 14. 2016

종말론, 07

소고 단편선

[6화]에서 이어짐. 

[첫화] 보기.





주말여행, 주말여행, 주말여행…….


머릿속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이런 때에는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잠깐 들어온 단어 한 토막, 노래 한 소절이 머릿속을 나가질 않는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단어가 머릿속에 엉겨 있다. '내가 왜, 내가 왜, 내가 왜.'하는 말이다. 애당초 화를 내야 하는 사람은 나 아닌가. 왜 되례 아지가 화를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고, 나는 어느 때보다 사력을 다해 가로등 아래를 빠져나갔다. 편의점에 들어가 최단거리로 버드와이저를 한 병 잡고, 계산대에 올렸다. 직원이 나를 한 번 쓱 쳐다보더니 이내 좋지 않은 내 표정을 파악하곤 말없이 카드를 받아 계산한다. 나는 다시 한 번 큰 걸음으로 편의점 앞을 나섰다. 계속되는 발걸음. 같은 속도. 무겁고 둔탁한 걸음 소리에 맞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학교 후문, 법학과 건물에 오래된 벽돌 계단에 도착하고 서야 나는 두 발을 바닥에 붙였다.


 “하아...”


나는 몸을 돌려 계단에 걸터앉았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못한 게 없다. 그렇지만 어떻게 아지와 대화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지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지는 내게 어떤 말을 할지,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상상하다 지우길 반복했다. 만약 내가 A라는 말을 꺼내면, 그녀는 나의 A를 공감해줄 수 있을까? 그녀는 왜 나에게 모진 말을 했던 걸까? 아지는 그 바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시나리오를 쓰고, 휴지통에 던지곤 가만히 생각을 거듭하다 휴지통에 손을 넣어 주섬주섬 그것을 펴서 이야기를 이어 쓰는 작가 같았다.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하루 내 나올 수 없단 걸 알면서도 밤을 지새우는 삼류 시나리오 작가 말이다. 또는 파도치는 백사장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 같은 기분이었다. 거침없이 내 발 밑으로 파고 들어와 정성껏 그린 그림을 지우고 가는 파도. 그 위에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아이. 나는 계속되는 파도 세례에 그림 그리던 막대길 집어던졌다. 시나리오를 쓰던 원고지를 태우는 것도 모자라 머릿속 집을 불태워버렸다.


"뻥!"

나는 병뚜껑을 따서 집어 들곤, 있는 힘껏 어둠 속에 던져버렸다.


“하아...”

이젠 의식하지 않아도 한숨이 절로 난다.


아지는 대체 내게 뭘 숨기려고 했던 것일까. 그냥 나와 헤어지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녀 말대로 정말 이야기 하기 곤란한 일이 있는 것일까? 고기 집을 뛰어나오기 전, 나는 형들에게 괜찮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형들은 이미 눈치를 챈 듯했다. ‘사진 속 그녀가 아지라’고. 술이라도 한 잔 더 하자는 형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집으로 온 내가 한심하다.


서 있는 몸뚱이에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어제보다 더 추워진 것 같다. 여름이 지나고 있다.


만약, 정말 만약. 그녀가 헤어지자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내가 그녀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 같진 않다. 그냥.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연애가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착한 친구를 만나게 됐고, 그냥 그렇게 사랑이란 걸 흉내 내보고, 연습하고 있는 것. 그런 감정이었다. 친구들과 여자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나는 쿨했다. 내 가슴속으로부터 불어오는 찬 바람을 느낄 정도였다. 나는 아지를 그렇게 진지하게까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나는 나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이 순간. 나는 아지가 보고 싶고, 아지가 화를 냈다는 것에 맞불로 화를 낸 나 자신이 잘못했다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헤어지잔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되뇌고 있다. 내 심장은 지금 몸뚱이의 공간이 비좁다는 듯 요동치고 있고, 콧등은 커터칼로 그은 듯 시리다.

150일간의 사랑.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것이. 이제는 사랑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인지와 동시에 깨어지는 것일까? 그녀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상대의 감정은 알 길이 없다. 그것을 재단하는 것은 월권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맥주병을 집어 들고 고개를 젖혀 평소보다 많은 양의 맥주를 한꺼번에 욱여넣었다. 맥주의 탄산이 목젖과 식도를 타고 따갑게 흘러내렸다. 한 번에 다 넘기지 못한 맥주 반 모금을 입 안에 물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젖혔다. 식도에서 시작되어 가스가 된 알코올이 콧김으로 뿜어 나왔다.


내가 이별의 전조를 알아 채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나는 왜 지금 아지에게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 거지? 왜 아지는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지? 아지는 지금 지 방 침대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망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생각은 한 가지가 채 정리도 되기 전에 다른 방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바람은 왜 이렇게 찬 지. 머리는 아까보다 더욱더 지끈거린다. 맥주 대신 아스피린을 샀어야 했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눌러 액정을 켜본다. 열두 시 사십 분. 쉽게 누구를 불러낼 수 있는 시간이 지났다.


나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들춰본다.

점점이 보이는 가로등과 붉은 네온 불빛의 십자가가 내 눈에 가득 날아와 촘촘히 박힌다. 주홍빛 가로등과 산등성이를 가득 채운 집들이 오늘따라 유달리 비실해 보인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삭막한 서울 하늘이 애석하고, 아무런 냄새도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바람이 내게 들이친다. 날숨을 틀어막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


"하아……." 나는 폐 속 깊은 곳에서 숨을 끌어 모아 바닥을 향해 내뱉었다. 푹 숙여진 고개를 쉬이 들어 올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훅 젖혀 하늘을 바로 쳐다봤다. 역시나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는다. 별도, 구름도. 서울 하늘은 참으로 혼탁하고 정처 없다.

나는 무릎에 손을 얹고는 노인네처럼 자리를 일어났다. 힘을 잔뜩 주었던 다리에 기운이 모두 풀려, 나는 휘청거렸다.


맥주 한 병 했을 뿐인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취한 것 같진 않은데, 혼잣말은 자꾸만 튀어나오려 하고 있다. 나는 터덜터덜. 왔던 길을 되새김질하며 아지가 선물한 시계가 있는 곳으로 다시 걸어가고 있다.


"나 정말 아지를 좋아하나 보다……."

마음에 담겨 있던 소리가 나도 모르는 새 입 밖으로 흘렀다.



[다음 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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