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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Aug 16. 2016

종말론, 08

소고 단편선

[7화]에서 이어짐. 

[첫화] 보기.





3장


우리는 다시 만났다. 당연히 우리는 이전과 같은 간격으로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우리는 분명 서로를 원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만났다.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본인들조차 모르고 있다. 그녀를 만나자고 한건 나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할 말 있다."라고 전화 하자, "알았어……."라고 짧게 말한 그녀. 지금 그녀가 내 앞에 앉아있는데,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는 중이고, 나는 매 초 생각의 실타래를 마구 얽다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그대로 태우고 있다. 그녀도 이런 나와 마찬가지인 듯. 풀린 눈으로 가만히 주문 해 놓은 아메리카노를 응시할 뿐이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오랜만이다, 이 기분은 친구와 교실에서 싸우다가 담임선생님께 걸려 교무실로 걸음걸음 옮기는 복도에서 들었던 마음이다. 끌려가는 나를 바라보며 반 친구들은 복도 창문을 열고 웅성거렸다. 내 앞에는 또각 걸음으로 나아가는 선생님이 있었고, 나의 옆으론 나와 다툰 그 녀석이 씩씩거리는 숨소리로 나와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삐거덕 소리 나는 복도, 웅성대는 소리, 선생님이 부모님께 전화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나는 귀에서 위잉- 하는 소리를 들었다. 공사장에서 들었던 쇳소리보다 훨씬 가늘고 높은 소리. 어린 나는 깜짝 놀라 귀를 막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꽉 막은 두 손바닥 안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그 소리는 오히려 외부 소리가 차단되자 더욱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나는 주위를 격하게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내 소리를 함께 들어주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달라진 내가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쇳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를 막지 않았다. 음률은 알지만 정확한 곡명은 불명한 카페 음악소리와 함께, 가늘고 긴 쇳소리가 이 공간을 메우고 있다. 그녀도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생각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오빠." 그녀가 입을 떼었다.

 "…어." 나는 평소보다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번 일… 그냥 넘어가자."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아메리카노에 꽂힌 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며 일부러 눈을 피하는 것 같진 않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풀린 눈으로 빨대의 입구, 그러니까 원통이 시작되는 부분을 동그랗게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싫어. 나는 더 알아야겠어?’ 또는 이것보다 더욱 모진 나의 이기적인 마음을 꺼낼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말 못 한다. 예전에, 아주 예전에, 사랑을 드라마나 텍스트로 배우던 시절의 나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멍청한 남자 새끼. 저러다가 뒤통수 맞지. 드라마는 다 저래?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네’라고. 비웃으면서. 그러나 당사자의 세계는 다르다. 나는 말하지 못한다. 궁금해할 수 없다.


내 머리 속, 엉키기만 시작한 실타래가 이제는 서로 단단하게 점착되는 기분이다. 나는 그녀처럼 고개를 숙여 손목 위에 올라가 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그리곤 그녀처럼 눈길로 가상의 원을 그리며 찬찬히 그것을 돌려본다.


내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아지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눈망울이 그렁그렁하다. 저 눈망울이 원하는 대답은 무얼까? 그 대답은. 나도 행복해질 수 있는 대답일까? 그녀의 고개와 내 눈이 마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 그래. 그러자."

다른 말은 첨언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너무나도 많은 나머지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창 밖에선 더 이상 매미가 울지 않았고, 클래식은 한 곡이 끝났다. 그러나 귓가를 맴도는 삐-하는 소리는 그 끝을 모르게 계속됐다. 이제 집에 가자고 해야 하나?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다. 그런데 왠지 오늘이 지나면 모두 괜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까진 아니더라도.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5분만."

그렇게 우리는 5분 여의 시간을 서로 엇갈리게 바라보다 헤어졌다.




집에 도착했다. 이른 저녁, 밖에선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오토바이 소리도 들린다. 아마도 배달인지 늦은 저녁과 야식을 배달하기 위해 부지런히 엔진 소리를 내며 쏘다닌다.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오늘따라 내 정강이보다 높다.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창문을 열곤, 창밖을 바라본다. 짙은 남색의 초 가을 하늘. 나뭇잎은 이제 생기를 잃고 스러질 준비를 하는 듯하다.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야겠다. 오늘 같은 날에는 카톡보단 문자를 보내야 할 것 같다.


 '조심해서 들어가.'

[전송하시겠습니까?]

[예]


문자를 보냈다. 더 써서 보낼 걸 그랬나. 조금 후회된다. 내가 오늘 확인한 것은 그녀의 진심, 아니. 정황상 사실이 아니다. 내가 오늘 정말로 확인했던 것은 내가 그녀를 정말로 좋아한단 사실이다. 그저께는 취기에 그런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실을 따지고 드는 말을 할 수 없었고, 그녀가 덮자고 했을 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가해자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그녀에게 어떤 말이 가장 위로가 될지를 고민하고 있다. 아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지금 그녀에겐 가장 큰 아픔일지 모른다. 그녀가 문자를 보긴 했을까? 답장을 해줄까? 답장을 하면, 그 답장은 누가 먼저 마무리 짓게 될까.


"띵띵"


그녀다. 설렘을 밀어서 잠금 해제.

'응, 오빠도.'


나와 같은 짧은 답장.

그녀와 나누었던 지난 답장과는 질감이 다르다. 예전 그녀의 문자에선 발랄함이 느껴졌다. 감추고 가리려야 가릴 수 없는 발랄함. 그녀에겐 그런 것이 있다. 포니테일을 좋아하는 남자들은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포니테일을 부탁하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포니테일을 하고 다니는 여자 친구, 그저 자연스럽게 머리를 양 갈래로 묶거나, 스스로 머리를 한쪽으로 땋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길 소망한다. 그녀의 발랄함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유쾌한 에너지는 부탁 같은 걸로 볼 수 있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 인생 23년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체득시킨, 말하자면 기질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자에선, 그녀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한 말인가.


답장을 해야겠다.

'그래. 잘 자.'


이제 9시가 조금 넘었는데, 멍청하게 잘 자라고 문잘 보냈다. 급한 마음과 생각 없는 행동의 결과다. 

아…  등신……. 회신해서 지우고 싶다.


 "띵띵"

 답장이 바로 왔다.


 '응, 오빠 잘 자요.'


문자는 여기서 끝이다. 그녀는 지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답장을 바로 해준 걸 보니, 그녀도 내 문자를 기다렸던 것일까? 문자를 한 번 더 해볼까? 아니다. 잘 모르겠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어쩌면, 어색하게 끝나는 것보다 이게 더 나은 걸지도 모른다. 그만하자. 잘 자라잖아.


복잡한 생각을 스탠드 불 끄듯 툭 하니 껐다. 그랬더니 조용한 자취방의 침묵이 더 커졌다. 나는 귓가를 채우는 공기 소리가 어색해 창문을 열다. 마음은 좀처럼 개운해지질 않았다. 기숙사에 사는 친구들을 불러볼까 휴대폰을 열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접었다. 생각 없이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을 켰고, 그래그를 수십 번 했다. 딱히 한 일은 없다. 찾고 싶은 정보도 없었다. 그냥, 답답해서 컴퓨터를 켰다. 그러나 인터넷 유머는 모두 원초적이고 단편적인 것들이어서 나의 공허함을 쉽게 채워주진 못했다. 나는 앉은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그것들을 대충 던져놓고는 수건 하나를 챙겨 화장실로 갔다. 샤워하고 일찍 자야겠다. 그녀가 잘 자라고 말했으니까.




[다음 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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