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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고 Sep 25. 2016

무제:160925, 토요일

소고 단편선


J씨,

그때 그 순간엔.. 정말 짧지만 분명히 섬광이 비추고 지나갔어.

나는 잘은 모르겠지만 잠시나마 기절을 했던 것 같아.
온몸에 힘이 빠지고, 정신을 차렸을 땐 목 뒤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거든.
딱 일 분 여의 시간이었을 거야. 내가 그와 인사하던 첫 순간 말이야.

그는 태생적 수줍음인지 약간 머뭇거리다가 내 손을 잡았고, 그 순간 나는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졌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 주변을 정리해주던 삼십 분. 아니, 약 한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쉴 새 없이 떠들었던 것 같아. 그는 은근한 추임으로 대답을 하는 듯, 않는 듯 노곤노곤 굴어댔지만, 나는 어쩐지 그런 그의 태도가 얄밉지 않았어.

나는 세상에 막 태어난 아이처럼 이것저것 물었어.

가령

지금 기분이 어때요?

라거나,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처음 뵀지만 보고 싶었어요.


같은 것들 말이지.


그래,

아마 나는 한순간에 그를 사랑하게 됐던 것 같아.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생긴 그의 얼굴, 손가락, 발짓에서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동시에 보이는 듯했거든. 그런데 그와의 만남은 그리 길지 못했어. 모든 헤어짐엔 사정이 있으니까. 우리는 이내 헤어져야 했어. 그런데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그가 보고 싶었어.

다음 날 만난 그는 약간이지 피곤한 얼굴로 저만치 떨어져 있었어. 나는 걱정이 됐어.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켜보는 일뿐이었지. 그것이 나를 괴롭게 했어. 마음 같아선 그 아픔을 나누어.. 아니, 그게 안 된다면 내가 전부 아파 주고 싶었어..




그녀는

여기까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다가, 이내 촉촉해진 눈을 말리기 위해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하늘에 대고 "후" 하고 크게 숨을 뱉었다. 그 소리는 가슴의 떨림을 타고 흘러나왔기에 그 울림이 균일하지 못했다.


나는 글을 적던 손을 멈추었다. 그녀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잠시 후, 그녀의 숨이 다시 자리를 찾았고, 나는 쥐고 있던 펜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어진 눈 사이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가 흐릿하게 지나갔다.
"이 녹음기에 그를 향해 말을 남길 수 있어요. 남기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내가 말했다.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나는.. 분명히 그를 사랑하고 있어.

이제 나는 그때보다 늙고, 주름졌고, 목소리에 힘이 없는 한 명의 작은 노인네지만.

나는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어.

그래, 나는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Уважаеми моето красиво бебе, аз те обичам."


그녀는 영어가 아니라 자국어로 메모를 남겼다. 나는 당장에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내가 그녀의 의미를 알게 된 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통역가에게 파일을 넘겨준 며칠 후였다.


통역가의 이메일에는 짧은 인사와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가야,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단다."

끝.



이 글은 故 장영희 교수님의 에세이 한 토막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원 글은 다음과 같아요.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데는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데는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기에는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데는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50분 만에 쓴 건데, 정확히 50분이 걸렸음을 아는 연유는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쓴 것이기 때문이에요. 자리에 앉고 노트를 꺼내고, 지난 메모를 정리하다가. 문득, 글을 쓰게 된 거죠. 표지에 사용한 샤갈의 그림은 이 이야기와 전혀 연관은 없어 보이지만. 샤갈의 그림을 보다 보면 어떤 그리움의 심상이 떠올라요. 이건 순전히 글쓴이의 느낌이겠지만요.

아, 그림 제목은 La-Danse. 1950년에 샤갈이 그린. 무중력의 자유로운 몸짓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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