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愛, 로路, 소설小說
02 카미노 데 산티아고

_ 이별의 증인

by Snoopyholic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렇게 다정해 보이던 두 사람이었는데, 10년을 함께해온 두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헤어지겠다니 이게 웬 날벼락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짜냐고, 왜냐고 묻는 내게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겨워졌어. 10년을 사귄 우리의 관계가 지겨워졌어. 그 중에서 7년을 같이 살았거든.

그렇다고 우리의 그 세월이 싫었다거나 한 건 전혀 아니야. 오히려 난 정말 행복했지.

마크를 만나기 전에 나쁜 남자 때문에 정말 힘들었거든. 가난하기도 했고.

괴로워하는 나에게 마크가 손을 내밀어주었지.

마크가 워낙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데다가 인심이 후한 탓에 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

그의 소개로 괜찮은 직장도 잡았고. 우린 서로 깊이 사랑했고 행복했어.

마크 같이 든든한 남자와 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감사해.

사실 마크는 이 길의 끝에서 나에게 청혼할 계획이야.

그와 내가 이 길을 걷기 시작하기 전에는 그런 계획을 들으면서 내심 기뻤지.

10년의 결실이 드디어 맺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고.

그런데 막상 이 길을 걸어보니까 말이야, 그게 아닌 거야.

이 산티아고로 향한 길이 보통 길이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잖니.”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녀를 바라만 봤다.


“생장피데포트에서 출발해서 스페인 국경에 막 접어들었을 즈음 프랑스에서 왔다는 외과 의사를 한 명 만나게 됐어. 워낙 유쾌한 사람이어서 며칠간 동행했지.

마크보다는 내 쪽이 편했는지 점점 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됐어.

하루는 마크가 너무 피곤하다고 먼저 잠들었었어. 왜, 그 때 타로카드 본 날처럼.

나도 자려고 했는데 잠이 오지 않는 거야. 그래서 밖에 나와 보니 그 의사도 있더라고.

특별히 울적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날 밤에 마크에게는 이야기할 수 없었던 내 내면의 이야기들을 그에게 털어놓게 된 거야.

커플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되니까 말하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생기게 되거든.

그 역시 아내에겐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며 나에게 그가 가슴 속 깊이 간직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기 시작했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우리가 내뱉는 언어에 서로를 향한 열정이 섞여있음을 알게 됐어.

하지만 서로 그걸 표면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지.

나에겐 마크가 있었고 그에겐 프랑스에 아내가 있었으니까.

그는 내게 키스하고 싶다고 했지만 난 거절했어.

그런 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함이나 막힘없이 우리의 대화는 이어졌지.

마치 우리의 언어가 서로를 애무하는 것 같았어.

지금 생각해도 가장 신기했던 건 그 밤의 대화에서 평생에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쾌감을 느꼈다는 거야.

나 자신이 행복으로 충만해지고 빛나는 느낌이었어.

그렇다고 그 외과 의사를 사랑하게 됐다거나 한 건 아니었어.

오히려 전혀 서운한 감정 없이 이제 이 남자랑은 아침이 오면 헤어지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

물론 그는 내 느낌대로 몇 시간 눈만 부치고 아직 캄캄할 때에 채비를 해서 떠났지…

프랑스 의사는 떠났고 마크는 언제나처럼 내게 잘해줬고 우리는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기에 난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믿었어.”


하늘에서 우리의 대화(라고는 하지만 바바라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있었다)에 훼방을 놓고 싶었던지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바바라와 나는 얼른 동네 선술집으로 뛰어 들어가 맥주를 시켰다.

와인을 시킬까도 생각했지만 이런 이야기에는 왠지 맥주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나 나름대로는 심각한 이야기를 듣느라 목이 탔던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맥주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하던 이야기 계속해봐.”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의사는 떠났고 넌 네가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믿었다고.”

“그가 떠난 뒤로 난 내 마크를 향한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아마 내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 밤에 미세한 균열 같은 것이 이미 생겼던 것 같아.

10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만큼 내가 사랑했던 사람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도 없다고,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한 존재라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흔들리게 된 거야.

그리고 이 믿음이 자꾸 흔들리니까 미세했던 균열도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내가 완전하다고 믿었던 행복이 사실은 완전하지 않았고 마크 말고도 나에게 특별한 쾌감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벌어지는 틈새로 파고 들어와서 내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댔어.

문제는, 아마 이대로 산티아고까지 가서 마크가 내게 청혼을 하면 난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사실이야.

그래서 이제는 산티아고로 한 발짝씩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두려워. 한편으로는 여전히 마크를 사랑하고 그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원래는 그냥 두려움을 무시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마크를 위해서라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해야지. 사실 어느 정도는 이런 내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긴 했어.

그런데 전혀 이해를 못 하더라고.

오히려 자기도 다른 여자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적 있다며 단순히 내가 그 의사랑 키스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눈치였어.

정말 웃기지, 어쩌면 난 그 날 키스보다 더한 무언가를 자기가 아닌 다른 남자와 나눈 셈인데도 말이야.

어딘가에 나에게 더 완전한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마크랑 결혼을 해서 남은 평생을 같이한다는 건 그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정말 못할 짓인 것 같아.”


바바라는 이야기를 마치고 뭔가 정리가 된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다정해 보이던 커플이었는데, 그렇다고 그녀가 프랑스 의사에게 사랑을 느꼈다거나 마크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10년이나 함께했던 세월은 그럼 뭐냐는 말인가?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곧 혼란과 의문은 떠나고 흐트러졌던 나의 마음도 제자리를 찾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완전한 사랑은 없다.

다만 그 불완전함을 견딜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바바라는 마크와의 사랑에 있어 떠오른 불완전함을 견디지 않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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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에 남았던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톡 쏘는 탄산 때문에 목구멍이 싸했다.

사랑을 끝내려는 바바라의 모습에 제이미가 크로스오버 됐다.

그러니까 그 역시 나와의 사랑에 찾아든 불완전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앞으로 마크가 겪게 될 정신적 고통이 훤히 보였다. 왠지 가슴이 찡해졌다.

물론 바바라와 마크가 함께 지나온 세월이나 둘의 관계가 어땠는지 모르니까 마크의 고통이 내가 겪은 것과 같은 것일 수는 없을지 몰라도 분명 비슷한 종류의 것이기는 할 것이었다.

이제는 단호한 표정까지 짓고 있는 바바라와 알베르게로 돌아갈 일이 심란했다.

그렇다고 비도 거의 그친 마당에 여기에서 계속 술이나 마시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우리는 잠시 가게에 들려 필요한 것을 산 뒤에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아무 것도 모르는 마크는 저녁을 준비했다며 우리를 맞았고, 테이블 위에는 언제 마련했는지 신선한 샐러드와 맛있는 냄새가 나는 스파게티가 차려져 있었다.

바바라는 마크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그를 다정하게 안아주더니 자리에 앉았다.

나는 계속 그녀의 눈치를 보며 가게에서 마련한 디저트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우리 셋의 저녁식사는 놀라우리만큼 평범했고 몇 개의 오가는 농담 속에 유쾌하기까지 했다.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쌉쌀함도 가진 초콜릿무스를 디저트로 먹고 설거지까지 마친 뒤에도 커플의 모습이 하도 가까워 보여서 나는 바바라가 내게 그냥 이별에 대한 농담을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내가 알베르게에 머무는 다른 순례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자, 커플은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알베르게 소등 시간이 다 되어서나 돌아왔다.

둘이서 이미 캄캄해진 다음에 돌아왔기에 나는 그들의 표정이 어땠는지까지는 살피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제발 해가 쨍쨍하게 빛나는 아침을 내려달라고 꿈속에서조차 간절히 기도했다.

다른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지만 어젯밤 나의 간절한 기도는 전혀 효과가 없었던 듯 창밖의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고 창문에는 빗방울들이 타고 내린 물줄기들이 가득했다.

슬쩍 바바라 커플이 있는 쪽을 들여다봤더니 그쪽도 먹구름이었다.

아마 지난밤의 이별선고와 한바탕 감정의 폭풍우가 지나갔던 게지.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혼자 잔뜩 어색해진 상태로 묵묵히 짐만 쌌다.


“세라.”

“어, 마크, 잘 잤어?”

“응. 그런데 말이야, 바바라가 많이 아파.”

“뭐? 아니 갑자기 왜?”

“모르겠어. 사실 어젯밤에 바바라가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어.

난 지금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같이 병원에 가자고 하는데 그녀가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자꾸 나보고 그냥 혼자 가래.

그래서 말인데, 네가 좀 도와주지 않을래? 열도 심하고 어젯밤부터 계속 토하고 있어.”

“알겠어.”

“정말 고마워, 둘의 길에 행운이 있길.”

“마크, 비도 내리는데 조심해서 가.”


그렇게 나는 한 남자의 쓸쓸한 등을 봐야만 했다.

그가 빗속으로 걸어 나가야만 했기에 시각적 효과가 극대화되어 나의 뇌로 전달됐다.

오랜 연인으로부터 급작스럽게 이별을 통보받은 남자는 하룻밤 사이에 쭈그러든 것만 같았다.

창밖에 흐르는 빗물보다 더 슬픈 뒷모습을 가진 남자가 홀로 빗속의 산티아고로 향해 난 길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를 투영시키자. 눈에서 솟구쳐 나온 두 줄기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동안 그들은 내가 그저 얕은 깊이라고만 믿고 싶었던 마크와 바바라 사이의 크레바스는 어쩌면 그 끝을 알 수 없으리만큼 깊은 것일지도 모른다며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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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를 위해 택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두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알베르게 주인 딸에게 적정한 요금을 지불하고 신세를 지기로 했다.

좀 전에 그렇게 매몰차게 마크를 보냈던 바바라도 막상 그가 떠나자 몸의 상태가 더 악화됐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의자에 위태롭게 축 늘어져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스르르 의자에서 미끄러져 내올 것 같은 그녀를 어서 병원에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초조해졌다. 드디어 빗속을 뚫고 차가 한 대 알베르게 앞에 주차했다.

운전수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중년의 여자였다.

그녀가 영어를 거의 못하기 때문에 어머니인 알베르게 주인을 통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바바라와 나를 병원이 있는 마을로 데려다달라고 말했다.

사실 어머니도 영어가 그다지 신통치 않아 나의 말도 안 되는 스페인어까지 동원됐다.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앉았던 바바라가 끼어들어 병원에 절대 가고 싶지 않으니 그냥 어디든 큰 마을의 알베르게로 데려다 달라고만 했다.

몸에 고열도 있고 상태를 봐서는 의사에게 꼭 보여야 할 것 같았지만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했으므로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요금을 지불했다.

다시 내 두 다리가 아닌 바퀴로 길 위를 달린다는 생각이 들자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우리가 지나가는 구간 중에는 내가 가보고 싶었던 오래된 성당도 있었다.

그 옆을 지나갈 때는 아예 창에 코를 박고 고풍스러워 보이는 성당의 겉모습을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봤다.

혹시 언젠가 다시 스페인으로 오게 되면 꼭 돌아와서 둘러보고 가리라고 결심했다.

창밖의 순례자들은 각자 인생의 짐이라 일컬어지는 배낭을 둘러매고 스스로의 속도로 걸어가고, 알베르게 주인의 딸이 운전하는 차는 빠른 속도로 그들을 지나쳐갔다.

지금이야 돌아오리라고 굳은 결심은 했지만 실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풍경이 희미한 가능성만 품은 상태로 함께 지나쳐갔다.

바바라와 그녀의 배낭을 한꺼번에 감당하여 알베르게로 데려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 땐 무슨 초인적인 힘이 났던지 무탈하게 그녀를 아직 아무도 없는 알베르게의 침대에 눕혔다.

원래는 순례자를 받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바바라의 상태를 본 오스피딸레로도 나를 도와줬다.


“필요한 거 없어? 약이라도 사다줄까?”

“아니야, 세라. 너무 고마워. 이제 너도 가.”

“무슨 말이야, 네 상태가 말이 아닌데 내가 어떻게 그냥 가!”

“너무 고맙고 네 은혜 잊을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난 쉬면 곧 나아질 거고,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누군가 필요했다면 너에게 머물러달라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냥 나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바바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제는 정말 나와의 의사소통도 단절하겠다는 듯 스르륵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의자를 끌어다가 그 곁에 앉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등 쪽이 따사로워 뒤돌아보니 창으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세상은 어느 새 회색의 음울함을 벗어던지고 눈이 부실 지경의 햇살 아래 맨살을 드러냈다.

비 때문에 내렸던 수분이 공기 속으로 증발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축축한 기분을 햇살 아래로 드러내놓고 뽀송뽀송하게 말리고 싶어졌다.

아직 이른 시간이기도 했기에 결정을 내린 순간 눈을 감은 바바라에게 얼른 나으라는 말만 속삭인 뒤에 배낭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왔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