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공동묘지 산책, 광인과의 조우
오랜만에 본 강렬한 햇살에 너무 눈이 부셔서 며칠 동안 쓸 일이 별로 없던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노출 과다로 조금은 하얗게 보이던 세상도 선글라스 렌즈를 투과해서 보니 어둡고 명암 대비가 뚜렷해졌다.
한동안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산책하듯 마음이 이끄는 대로 마을(이라기보다는 소도시 정도의 규모는 됐다)을 돌아다녔다.
흥겹게 술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고풍스러우면서도 매력적으로 나무에 조각되어 마음을 사로잡는 선술집의 간판이라든지 파란 하늘 아래로 강한 실루엣을 드러낸 교회의 종탑이라든지 적당한 습기와 가을의 냄새를 함유한 상쾌한 공기 덕에 좀 전까지 내게 드리웠던 걱정의 그림자를 말끔하게 걷어냈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서야 육중해 보이는 문 옆에서 노란 화살표를 발견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거대한 문이 슬쩍 열려 있기에 틈으로 슬쩍 들여다보니 공동묘지였다.
굳이 망자들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고양이 여러 마리쯤은 죽였을 것이 분명한 강력한 호기심에 이끌려 안쪽으로 들어가 봤다.
영국에서 본 묘지들은 거의 풀밭에 십자가들이나 묘비가 드문드문 서있는 모양이었는데 이곳의 무덤들은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렇다고 납골당처럼 조그맣게 쌓인 것도 아니었다.
겉을 고급스러운 대리석으로 치장한 커다란 석관들이 아파트 블록처럼 정렬되어 있던 것.
이 특이한 무덤의 미로 속을 가볍게 헤매본 뒤에 노란 화살표를 따라 가기로 결정하고는 설마 냄새나는 옷과 수건, 양말, 속옷 따위가 가득한 배낭을 가져가려고 하지는 않겠지 싶어 어깨에서 무거운 배낭을 내렸다.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서려는데 갑자기 죽음의 냄새가 훅 풍겨져왔다.
다른 곳보다 밀도가 약간 높아 무겁게 느껴지는 이곳의 공기에 약간의 부패하는 듯한 냄새와 곰팡이 냄새, 방부제 냄새, 성당에서 가끔 맡았던 이국적인 향내 같은 것들이 미세하게 스며들어 죽음의 냄새를 형성했다.
처음에는 망자들이 이방인을 경계해서 뿜어내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공동묘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음속으로 망자들에게 산티아고로 향하던 길에 잠시나마 벗이 되어주려고 왔으니 너무 냉대하지는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묘지 산책을 이어나갔다.
무덤들은 마치 신시가지에 가지런히 정렬된 집들 같았다.
좁게 다닥다닥 붙어 올라가 꼭대기에는 성당이나 교회처럼 삼각형 지붕에 십자가를 단 모습이 대세였는데 그런 건물 한 채에 가족들이 매장된 것 같았고 제법 여유가 있어 보이는 널찍한 층 하나에는 부부가 함께 묻히는 것 같았다.
무덤들 앞에는 영원히 시들지 않을 플라스틱 꽃들이 화사하게 혹은 빛이 바랜 채 망자들을 위로하려고 꽂혀 있었다.
그러다가 후손들이 다녀간 지 얼마 안됐는지 싱싱하고 탐스러운 노랗고 하얀 꽃이 기다란 녹색 잎사귀와 함께 꽂힌 부부의 묘를 발견했다.
최근에 죽었나보다 하고 명패를 들여다봤더니 웬걸,
Josefa Lopez Armesto
1894-1979
Constante Paramo Losada
1888-1942
1800년대 말 즈음에 태어났던 이들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망자가 되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늦게 죽은 사람이 부인이었을 것 같은데 남편은 어떻게 죽었으며 37년이라는 세월을 혼자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했다.
스페인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으니 전쟁 때문은 아닐 테고 남편을 54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보내야 했던 48세의 미망인은 이곳에 같이 묻히기까지 37년이란 세월을 죽은 호세파의 아내로 그리고 아이들의 어머니로 나중에는 손녀, 손자들의 할머니로 늙어갔을 것이다.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됐을 때 그녀는 드디어 사랑했던 남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혹은 그저 소심하게 한 남자의 아내였던 자신의 인생이 지루했다고 후회했을지도.
물론 죽어서도 후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헌신적으로 가족을 돌봤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가정에서 해본 상상일 뿐.
생화로 장식된 무덤보다 훨씬 많은 조화 장식이나 아니면 그 누구도 돌보지 않은지 꽤 오래됐음이 명백해 보이는 무덤들 사이를 산책하며 사실은 이렇게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묘지를 만드는 것은 망자들을 위함이 아니라 그저 산자들이 마음 편하게 망자를 그리워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래도 그리워해주는 사람 없이 쓸쓸하게 묘지 주변을 배회하는 망자가 많다는 건 한 없이 쓸쓸하니까.
망자는 단지 망자일 뿐이고 죽음의 냄새가 떠도는 묘지는 산자를 위로하기 위해 존재할 뿐인 거다.
공동묘지에서 나오자마자 가볍고 상쾌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노란 화살표는 나를 시골길로 인도했다.
울창한 밤나무 숲을 지나 돌담길이 나타날 즈음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파져서 길가에 자리를 만들어 가방 속의 치즈와 빵, 오렌지주스를 꺼내 허겁지겁 점심을 해치웠다.
다시 배낭을 등에 밀착시키고 출발하려는데 말을 타고 순례중인 스페인 남자들이 지나가며 알은체를 했다.
나도 반갑게 알은체를 하긴 했지만 저치들이 지나가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말똥을 조심해야 했기에 말 궁둥이 언저리에서 휘날리는 말꼬리를 보면서는 울상이 됐다.
그래도 옛날 기분을 양껏 내며 근사한 가죽 모자를 쓰고 여행을 하는 그들이 대단해보이긴 했다.
사료 챙기는 것이야 기본일 테고 말까지 재워줄 숙소를 찾는 것 자체가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니 말이다.
이들 말고도 말이나 당나귀로 여행하는 순례자들이 아직 꽤 있긴 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한참 이어진 숲 속의 돌담길도 끝나고 안내서에도 표시되지 않은 작은 마을도 몇 개 더 지나니 산티아고까지 100km 나왔다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슬슬 다리가 아파왔다. 다음에 나타나는 알베르게에서 무조건 쉬기로 하고 힘들지만 열심히 걸었다.
넓은 채소밭에서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선글라스를 끼고 채소를 따는 할머니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한참을 더 걸은 끝에 넓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마침내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무조건 씻고 뻗어버리고 싶었지만 상점이 문을 닫아버리면 곤란했기에 막 나가려는데 언제 봐도 건장한 독일인 보도가 말을 걸어왔다.
“세라! 이게 얼마만이야?”
“보도! 너무 반가워.”
“어디 가?”
“응, 상점이 문 닫기 전에 뭘 좀 사오려고. 저녁 만들어 먹어야지.”
“그러잖아도 내가 뭘 좀 만들고 있는데. 같이 먹자.”
“그래도 돼?”
“당연하지, 이래봬도 내가 하는 음식들 꽤 훌륭하다구. 넌 와인을 한 병 사. 비싼 거 말고 그냥 테이블 와인이면 돼. 나도 한 병 있긴 한데 와인은 많을수록 좋잖아!”
“오케이! 뭐 더 필요한 건 없구?”
“여기 시설이 엄청 열악해. 지금 내가 요리를 하는 냄비도 사용하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어. 숟가락은 두 개고 포크는 몇 개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사용 중인지 안 보여. 그러니 혹시 플라스틱 포크랑 숟가락 있으면 좀 사다줘.”
“응, 다녀올게!”
필요한 물품을 사다가(숟가락은 못 샀다) 놓고 샤워를 하고 내려와 보니 고맙게도 보도가 저녁 세팅을 끝내놓았다.
하늘도 어둑해져서 투명한 남색 빛깔을 뗬다.
그는 감자와 파스타를 냈다.
뭔가 어설퍼 보였지만 맛은 기가 막혔다.
한 병의 와인이 이미 비워지고 두 번째 와인 병도 반쯤 비워졌을 무렵 갑자기 알렉스가 불쑥 들어왔다.
한동안 못 봤던 그였기에 활짝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도 잠시.
그의 행색이 말이 아님을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도 안 되게 큰 운동화를 먼지가 잔뜩 묻어 지저분해진 츄리닝 바지에 목이 늘어난 얇은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몸에 맞지 않을뿐더러 낡아져서 우스꽝스러운 정장 윗도리를 걸치고는 새까매진 야구 모자를 삐뚤어지게 쓰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건들거렸다.
자세히 보니 싸우기라도 했는지 얼굴에 멍도 들었고 상처도 보였다.
곁에 루비가 없다는 사실도 이상했다.
잘 지냈느냐고, 루비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미안하지만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다며 계속 횡설수설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알베르게를 휘젓고 돌아다닐 뿐이었다.
나는 왠지 무서워져서 보도 뒤에 숨었다.
다른 순례자들도 알렉스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무언가를 수군댔다.
혹시 저들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것일까?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있던 보도가 나서서 알렉스에게 와인을 한 잔 따라주고는 독일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둘은 뭔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담배라도 피우려는지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겨진 나에게 한 순례자가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혹시 저 사람 알아?”
“잘은 아니지만 몇 번 만나서 같이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고 했지. 혹시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사실은 한 이틀쯤 전이었는지 그를 본적이 있어.”
“어디에서?”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길 한 가운데서 자기의 물건을 모조리 꺼내서는 사람들에게 가져가라고 소리 지르고 있더라고. 몇 몇 사람들이 말리는 것 같았는데 막무가내였어. 난 그냥 지나쳐왔고.”
“참 멀쩡한 청년이었는데.......어쨌든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천만에. 조심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던데.”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애가 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남자의 이야기는 길어지는 것 같았다. 한참 뒤에야 보도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알렉스와 들어왔다.
“세라, 아까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미안해. 그런데 나한테 요즘 끔찍한 일이 있었어. 그녀가 사라졌고, 나쁜 놈들이 내 물건을 다 털어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내 옷과 신발까지 벗겨갔어. 다행이 나를 발견한 경찰이 신발과 옷을 줘서 이렇게 입고 있는 거야. 그런데 이 옷이 너무 얇아서 추워 죽겠어. 카메라도 가져가고 다 가져갔어. 나를 때리고 내 옷까지 벗겨갔어. 경찰들 덕에 옷 입고 여기까지 걸어 온 거야. 난 산티아고까지 못 갈지도 모르겠어. 아니, 갈 거야. 거기서 그녀를 꼭 만나고 말거야.”
자꾸 이야기하는 ‘그녀’는 루비인 것 같았다.
그보다 방금 내가 들었던 증언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의 이야기와 그의 이상한 행동과 텅 빈 눈빛에서 예전에 알았던 꿈 많던 영화학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서 나는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눈치를 챘는지 보도가 나를 알렉스로부터 떨어뜨렸다.
“세라, 진정해. 지금 네가 보다시피 알렉스가 제정신이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고 했지만 자꾸 횡설수설해서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나는 보도에게 아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줬다.
“그랬구나. 아무튼 내일 산티아고로 갈지 안 갈지를 결정하라고 해서 내가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아.”
“그래. 알았어. 알렉스를 잘 부탁해.”
“응, 걱정 말고 기운 내.”
다음날 아침, 보도는 알렉스가 다시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원망하듯이 놓치면 어떡하느냐고 아픈 사람인데 괜찮겠느냐고 걱정했더니 그 특유의 말투로 “노 프로블럼” 하고는 허허 웃을 뿐이었다.
함께 출발하긴 했지만 워낙 낙천적인데다가 술을 좋아하는 보도라서 선술집만 나타나면 들어가 맥주와 코냑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그와는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됐다.
이후로는 누군가 사주는 점심을 먹고 길에서 마주치는 순례자들과 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고 다시 새로운 순례자를 만나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하면서 걷기만 했다.
머릿속은 어젯밤에 만난 알렉스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다.
어떻게 그렇게 미래의 약속과 행복으로 빛나는 눈빛을 가졌던 청년이 광인이 되어 돌아올 수 있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총명하던 초점을 잃어버린 그 불쌍한 청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묵묵히 길을 걸었을 뿐이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