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어떤 연인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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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신한 침대에서 푹 쉬며 아름다운 마을 곳곳을 산책하고, 비록 혼자이긴 했지만 괜찮은 레스토랑을 추천받아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뒤에 길 위로 돌아왔기 때문인지 몸도 마음도 긍정적인 에너지로 충만해져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가볍기만 했다.
오랜만에 한국의 엄마와 통화한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의 꿈을 꾸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어서 결국 한국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더랬다.
그리고 동생은 마침 옆에 있던 엄마를 바꿔줬다.
걱정이 가득한 엄마의 목소리에 그리움이 묻어있다는 확신이 들자,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해서 말을 이을 수 없을 정도로 울음이 터져버렸다.
엄마도 그랬던 건지 우리는 수화기만 붙잡은 채 울거나 흐느끼느라 거의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오고 간 대화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꿈속에서 느낀 것과 똑같은 엄마 품안의 따스함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느낄 수 있었고, 진심으로 행복해졌다.
점심식사 무렵, 길 위에서는 엘리야를 만났던 알베르게에서의 밤에 심각하게 둘러 앉아 타로카드 점을 봤던 바바라를 다시 만났다.
그땐 존재도 몰랐지만 그녀는 남자친구 마크와 함께 걷는 중이었다.
우리는 작은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서 함께 가진 식량으로 끼니를 때웠다.
내가 내놓은 식량이 별로 없었기에 저녁식사 때 맛있는 디저트로 보답하기로 했다.
사귄 지 10년이나 됐다는 그들은 서로를 도와 이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배낭 무게를 합친 것보다 내 배낭의 무게가 더 무겁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배낭의 무게는 인생의 짐 무게와 비례한다던데 역시 난 여전히 너무 과한 욕심을 가지고 이 길 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벌써 한 달 가까이 혼자서 씩씩하게 이 길을 무탈하게 걷는다고 믿고 있었는데 마크의 눈에는 내가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는지 피곤할 때는 물만 마셔도 도움이 되니 꼭 물을 지참하라는 둥, 무릎 관절이나 발쪽에 무리가 가니 가방에서 비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가차 없이 비우라는 둥, 몸이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은 피로가 찾아오면 무리하지 말고 반드시 쉬었다 가라는 둥 이런 저런 조언들을 들려줬다.
특별히 급경사의 언덕이나 산을 넘어 가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크는 갈리시아 지방의 눅눅하고 아직 짙기만 한 녹색 마을의 가파른 길이 나타나면 꼭 바바라에게 손을 내밀어 이끌어주는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나에게도 저렇게 손내밀어줄 든든한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움에 젖을 겨를도 없이 갑자기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에 젖어버릴 상황에 처했다.
서둘러 방수체제로 돌입하긴 했지만 빗방울이 꽤 굵어서 오래도록 걷을 상황은 아닌 듯 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걸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설상가상으로 기온도 떨어지는 것 같았다.
괜히 몸살이라도 걸리면 골치 아파지겠다 싶어서 다음 알베르게가 나오면 바로 들어가 배낭을 풀기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공식 알베르게가 훨씬 저렴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바바라 커플과 나는 그냥 몇 유로를 더 주고 사설 알베르게에 묵기로 결정했다.
수용 인원수도 적고 신설되어 시설이 깨끗하고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얼른 마음에 드는 침대를 골라 가방을 던져두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서 젖은 옷을 널었다.
창문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빗물이 격렬하게 부딪혀 흘러내렸다.
바람까지 제법 몰아는지 빗방울은 자꾸만 사선으로 미끄러졌다.
미리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은 건 역시 올바른 선택이었다.
저렇게 심한 빗속을 걷는다는 건 전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이곳이 갈리시아 지방이라는 점이었다.
가을부터 비가 자주 내리기 시작해서 겨울에는 비가 안 내리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하는데 앞으로는 운이 없으면 내내 저런 빗속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약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만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던 빗물의 속도가 점차 느려지더니 이제는 예쁜 물방울로 멈췄을 즈음 바바라가 비가 그친 것 같으니 잠시 산책이나 하자고 제안해왔다.
마침 앞으로의 날씨에 대비해서 우비라도 구비해야하나 하던 참이라 흔쾌히 따라나섰다.
그런데 알베르게의 문을 나서자마자 그녀가 폭탄처럼 선언했다.
“나 오늘 마크랑 헤어질 거야.”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