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길었던 연휴
정말 드물게 길었던 연휴였다.
시간이 많으니 글도 많이 쓸 수 있을 거고 그림도 많이 그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냥 연휴가 아니라 '추석'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던지라 전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튼 여기 저기 다니면서 추석 음식을 장만해서 가족들과 친척들과 나누어야 했고 나는 뭐라도 거들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기회만 오면 그리겠다고 늘 스케치북과 그림그리는 도구를 챙겨나간 건 새로운 변화였다.
그러니까......내 가방은 조금 더 무거워진 것이다.
ㅠ_ㅠ
에혀, 인생이 다 그렇지 뭐.
특별한 일은 없었다. 평안하게 지나갔던 나날들.
맛있는 걸 먹고 소설을 매일 조금씩 써나가고 차를 마시고 가족들과 웃고 산책을 하고 저녁엔 맥주나 와인을 한잔 걸치고.....아, 오랜만에 공방을 돌려 액세서리를 만들고. 그리고, 당연히, 그림도 그리고.
#199 실험중
크레파스라는 도구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어졌다.
아무튼 집에 사둔 게 있으니까 이걸로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
색이 어떻게 섞이는지....뭐 그런 것을 보겠다고 한번 그려봤다.
찌꺼기가 많이 나오는 게 늘 싫었는데 또 그걸로 재미있는 효과를 낼 수도 있구나 하며 깨달았던 시간.
유치원 다닐 때 크레파스로 그림 그렸던 것을 떠올리며 다시 재미있게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음.
#200 싹둑
머리카락을 잘랐다.
엉덩이까지 치렁치렁 내려왔던 아주 기인 생머리였다.
미용실에서도 어쩌면 이렇게 아무런 관리도 없이 길게 기를 수 있었느냐며 놀라는 눈치.
(모친 말마따나 이런 원시인이 다 있나 했을 것임...ㅋㅋㅋㅋ)
급 마음이 동해서 마지막 손님으로 들어가 머리카락을 잘라달라고 했다.
그때 안 자르면 또 한동안 못 자를 것 같았거든.
나름 그림을 통해 내가 머리 모양을 바꾸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 그렸는데.....
깊고 깊어 새벽으로 향하는 시간에 그것도 녹색으로 내 모습을 그리는 일은 다시는 하지 않기로...ㅋㅋㅋ
정말 언제쯤에나 인물을 잘 그릴 수 있을 것인가....길이 멀고 험하도다.
#201 Cosmos
연휴 때 어반스케치로 그리고 싶었던 꽃.
자리가 마땅치 않고 또 뭔가 넘 분주했던 나머지 여유가 없어서 일단 사진으로 찍어뒀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린 그림.
참 평범한 꽃인데도 뭐랄까 마음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구석이 있는 꽃이다.
굳이 노래가 아니더라도 한들한들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예쁜이.
얼마 전에 만난 친구가 늘 의문이었던 대체 왜 물감 색이 많은가에 대해서 답해준 적이 있는데 이 그림을 그리면서 그 말이 뭔 뜻인지 고개를 끄덕이게 됐던!
자신의 물감을 흔쾌히 나누어준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경건하게 가졌던 시간.
#202 GREEN HOLE
201번에서 물감에 대해서 이야기해준 친구가 이제 자신은 안 쓴다며 미술학도였던 동안 썼던 팔레트 두 개를 나에게 줬다. 그 팔레트에는 친구가 그림을 그렸던 시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문득 녹색이 꽤 다양하게 들어 있다는 걸 발견했기에 거기서 착안해서 그려본 그림이다.
우주에 블랙홀이 있다면 이건 초록홀이구나 싶어서 그린홀이라고 이름 붙임.
#203 Old souvenir from NZ
1994년 겨울방학, 뉴질랜드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먼저 간 곳이 로토루아. 마오리족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
진흙이 꿀렁거리며 유황 가스를 분출하는 모습이 보이는 숙소에서 묵었던 기억.
원주민이었지만 자신의 영토를 침범당하고 서러운 핍박을 받아왔던 마오리족에 대해 알게 됐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만은 얼마나 독특했던가!
곳곳에 세워진 나무상들에서 우리나라 장승을 떠올렸고 그들의 전설에서도 친근감을 느꼈다.
중학생이었던 내가 딱히 대단한 것을 사올 수는 없었고 그래도 마오리족의 정신이 담긴 뭐라도 하나 갖고 싶다는 마음에 나무로 만들어진 편지칼을 사왔더랬지.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추억이 갑자기 밀물처럼 밀려오는 순간, 이걸 그렸다.
그나저나 언제 다시 가려나, 뉴질랜드엔. 정말 많이 변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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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길었던 연휴의 끝이 보인다.
나른하게 늘어놓았던 마음들을 거두어 다잡을 때가 왔다.
쓰고자 했으나 못 쓴 글들을 쓰고 지금 쓰는 단편소설 초고를 마무리하고 미루고 미뤘던 중국어 추가 공부도 좀 하고 막바지 출판사 미팅도 하고....
해야 할 일들의 쓰나미가 덮쳐올 예정.
그래도 좋기만 하다. 무질서 속의 한가로움이아닌 질서 속의 한가로움이 그리웠던 참이라서.....
역시 아무렇지 않게 그림을 그릴 것을 약속하면서....
다음주에 봅시다.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