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가난하지만 여행은 떠나고 싶어_ 00

고장난 심장

by Snoopyholic

모르겠다.

정확히 그게 언제 시작됐는지.

난 그저 늘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꿨을 뿐이다.


어디라도, 전혀, 다른, 낯선, 장소, 이국의, 언어, 이질적인, 이목구비, 멀리, 떨어진.


누군가는 그걸 '역마살'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그걸 '방랑벽'이라고 했다.

떠돎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이유도 없이 걸을 수 없었다. 심장이 고장났다.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꾸만 떠났다.

누군가는 운명처럼 사랑에 빠져 방랑을 멈추었고,

누군가는 깨달음의 계시를 얻어 앞길을 개척했고,

누군가는 영감을 삶 속으로 불어넣었지만,

나는 그냥 터벅터벅 떠났던 자리의 내 삶으로 돌아왔을 뿐.


현실이 나에게 요구한 대가는 닿을 수 없는 꿈에 사로잡히는 고통이었다.

그 꿈을 좇느라 현실세계에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내가 무중력 상태라 믿었던 현실이 완벽한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자꾸만 헛웃음이 나고, 눈물이 흐르고, 고장난 심장으로 숨이 쉬기 힘들었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다.

막대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스스로를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다른 곳을 꿈꾸지만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그저 숨을 크게 쉬려고 안간힘을 쓰고 제자리에서 열 걸음이나마 떨어진 곳에 닿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가난하다.

그래서 떠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도록 떠나고 싶다.

더 이상 다른 일은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간절히.

비겁한 나는 자주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 가까이 다가간 적이 있어서 그게 어떤 맛이었는지 알고 있으므로.


아주 잠깐 뒤를 돌아봐도 될까.

내가 지나온 빛나는 길을 아주 잠깐만 바라봐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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