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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Jan 16. 2024

나는 육체노동자입니다

육체노동의 나날들_ 00

새벽 4시, 알람이 울린다.

예의상 알람을 꺼준다.

15분 뒤 다시 알람이 울린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베개를 옆으로 밀어놓고 다리 운동을 시작한다.

하나부터 오십까지 세고 나면 팔 스트레칭을 해준다.

일어나서 얼굴에 물칠을 하고 양치질을 한 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상온의 물을 큰 컵으로 원샷한 뒤 가방에 도시락을 넣고 검색한 날씨에 따라 필요한 추가 물품을 몇 가지 챙겨 넣은 뒤 버스정거장으로 향한다.

첫 차를 타고 새벽을 달려 도착한 지하철 역에서 다시 첫 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달린다.

일터에 도착해서 휴게시간에 내 이름 석 자를 적어 넣고 물도 한 잔 마시고 화장실도 다녀온다.

일 시작 5분 전, 방한복을 꺼내 갈아입으며 안전화도 착용한다.

새벽 6시, 단말기에 로그인하고 냉장 워크인으로 들어가 갓 들어온 신선제품들을 진열하기 시작한다.

냉장이 끝나면 더 깊숙한 곳에 위치한 냉동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영하 23도의 추운 곳.

물건을 진열하는 동안 손과 발이 얼어붙어감을 느낀다.

오직 이 모든 일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속도를 높이려 애쓴다.

겨우 워크인을 탈출하면 얼어붙었던 숨이 물방울이 되어 후드득 떨어진다.

휴지로 닦고 이제 상온의 물건을 진열하러 간다.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물건들의 제자리를 다 찾아주고 나면 종이 상자의 물건들 차례.

냉장 워크인으로 돌아가 아까 급히 진열하느라 제대로 못 본 채소들의 신선도를 다시 한 번 점검해주고, 포장재와 보냉재를 채우고 잠들었던 기계들을 깨우고 나면 마침내 영업 준비가 끝난다.

오전 9시.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바구니를 들고 고객이 주문한 물건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담아 포장해 라이더들이 가져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들면 된다.

근무 시간이 끝날 때까지.

철보충재로 무겁고 딱딱한 안전화를 신고, 무거울 때는 10kg 가까이 되는 바구니를 든 채 만오천 보에서 이만 보를 걸어야 한다.

물론 그 사이 유통기한을 살피고 전산상의 물건과 실제의 물건 상태가 일치하는지도 검사해야 한다.

그것 말고도 해야 하는 일들은 차고 넘친다.

그래서일까, 딱 한 시간 주어지는 휴게는 세상 그 어떤 한 시간보다 달콤하고 귀하고 소중하다.

하지만 왠일인지 그 한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도 해, 마치 손 위에 떨어지자마자 녹아 사라지는 눈꽃송이처럼.

어쨌든 세상에 믿을 구석이라곤 아무리 일이 많아도 퇴근시간은 온다는 것뿐.

땀에 절은 몸으로부터 배어나오는 특유의 체취를 마구 풍기며 지하철 군중 속 틈바구니에 낑겨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은 마치 천 리 같다.

힘겹게 도착한 집에선 글도 더 많이 쓰고 영상도 더 많이 찍고 편집해서 올리고 미뤄왔던 인스타툰 연재도 시작하고 그림도 더 많이 그리고 악기도 더 열심히 연습하고 싶지만 그건 다 그러고 '싶을' 뿐.

파김치가 되어 소파와 물아일체를 이룬 채 빈둥거리다가 겨우 뭔가를 위장으로 밀어넣고 몸을 씻고 나면 다시 새벽 4시에 일어나기 위해 잠들어야 한다.

일찍 자는 편이 좋다는 걸 알지만 많은 날 그 계획은 실패한다.

늦게 잠들면 수면시간이 줄어들고 줄어든 수면시간은 즉각적으로 육체노동에 부담으로 가중된다.

사실 이 일을 어느 정도 하면 익숙해져서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이 일은 하면 할수록 나를 닳게 하고 혹사시키는 구조였다. 일 시작했을 때 오히려 더 열심히 하고 싶은 것들을 해냈지 싶다.

쉬는 날에도 똑같이 일어나 글을 쓰고 영상을 편집하고 그림을 그리고......뭐 그랬던 것 같다.

피로가 점점 누적되어갈수록 쉬는 날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졌고 무기력은 증가했다.

어차피 이루지도 못할 거 되도록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은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 편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

난 그저 몸 쓰는 일을 하는 육체노동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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