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키폴 공항
1_
스키폴 공항의 유리창에는 어두컴컴한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빗방울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한여름의 짙은 초록빛으로 빛나는 스타벅스 간판 주변에는 커피의 향기가 미치는 반경까지 노트북, 스마트폰, 태블릿 패드를 들고 무선 인터넷을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어슬렁거렸다.
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트렌치 코트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지만
이내 포기하고 톨 사이즈의 따뜻한 차이티라떼 홀짝였다.
이 달착지근하고 향신료와 우유의 맛이 나는 음료를 건넨 내 앞의 남자와는 베이징 제3국제공항에서 이륙한 비행기의 이코노미 석에 9시간 동안 나란히 앉았다가 착륙한 사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 남자는 안경을 끼고 미간을 찌푸린 채 알 수 없는 기호 같은 간체자 중국어로 가득한 책을 읽는 중이었다.
마른 얼굴에 걸쳐진 뿔테 안경에서조차 날카로운 느낌이 뿜어져 나오는 듯 카리스마가 넘쳤다.
주눅이 들긴 했지만 창가에 있는 내 자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의 양해가 필요했고 독서를 방해하는 것이 미안해서 나는 익스큐즈미를 연발했다.
시선은 책에 고정한 채 무뚝뚝하게 일어나 비켜주는 남자.
앞으로 긴 비행시간 동안 적어도 두세 번은 화장실로 가기 위해 그를 지나가야 하는데 까칠한 사람이면 어쩌나 걱정이었다.
자리에 앉아 항공사에서 제공한 담요까지 펼쳐 덮은 뒤, 나도 가방에서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1>을 꺼냈다. 문득 옆의 남자가 중반부쯤 읽고 있는 암호로 가득한 두꺼운 책의 제목이 궁금해졌다.
평소라면 말을 아꼈겠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비행기에서 종이로 된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이 반갑기도 하고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볼 겸 용기를 냈다.
“저기... 무슨 책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혹시 영어를 못 한다면 어색한 웃음으로 끝나고 말테지.
“미국 작가 잭 케루악의 <온더로드>라는 책입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잭 케루악이라고 했나요?”
“네.”
“신기한 우연이네요, 제가 들고 탄 이 책도 그 작가가 쓴 같은 책이에요.”
나는 한글로 된 내 책을 흔들며 웃었다.
우리는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서로의 책을 펼쳐봤다.
둘 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뭐라고 써진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방금처럼 서로 말을 섞어 제목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절대 두 책이 한 작가의 같은 책이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나 다른 문자들로 채워졌는데 같은 내용이란 게 믿기 힘들어요.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난 세라라고 해요.”
2_
톨 사이즈 컵에 둘러진 스타벅스의 로고 속 인어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쯤이야 쉽게 꿰뚫어볼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하긴, 세계 각국 매장에서 팔리는 거의 모든 커피, 차, 혹은 음료 한 잔에 박힌 그녀는 별의별 사람을 다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어왔을 테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거만한 그녀와 대조적으로 남자는 초조한 얼굴로 자꾸만 시선을 손목시계로 돌렸다.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는 것일 터.
베를린으로 간다고 했다.
나의 비행기 시간은 넉넉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게이트까지 동행해주기로 했다.
그 정도면 차 한 잔의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남자도 반기는 눈치였다.
통성명을 하고 국적과 거주지, 각자의 최종 목적지를 밝힌 뒤 우리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어떤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는가, 로 옮겨갔다.
놀랍게도 그의 직업은 예술가였다.
나는 정말 예술만으로 밥벌이가 되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이 단지 먼저 길을 걸은 사람으로서 같은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을 안내하는 것일 뿐 어떤 지식을 전수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다시 물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곳에서 발견해 기억나는 이름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어떤 작업을 하는지 알려줄 수 있냐고 하자,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예술관련 행사나 전시에 초청받아 작품을 설치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한국은 광주 비엔날레의 나라였다.
베를린에 가는 이유도 그곳에 있는 관련 기관에서 공간을 내주어 삼 개월 동안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태까지 독일은 카셀 도큐멘타의 나라였는데 이제 새로운 정의가 하나 더 추가됐다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대륙의 기상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중국에 가본 적 있어요?”
“네. 베이징이랑 내몽고에 가봤죠. 그런데 좀 오래된 일이라 기회가 되면 다시 가보고 싶어요.”
“그래요? 언제였는데요?”
“십 년? 잠깐만요 그것보다 더 됐나?”
“허허, 베이징 올림픽 전이네요. 그럼 꼭 다시 한 번 가 봐요. 다른 세상일 테니.”
“그러지 않아도 공항에서 엄청 놀랐어요. 제가 갔을 때만 해도 그냥 아주 작은 곳이었는데 규모가 다르던데요.”
“베이징 올림픽을 치르며 그런 규모의 공항이 몇 개가 들어섰는지 몰라요. 공항뿐만이 아니에요. 세계에 중국이 이렇게 달라졌다고 보여주려고 참 많은 것을 부수고 새로 지었죠. 정말 발전한 거라면 자랑스럽겠지만 그 껍데기만 벗기면 속은 여전히 곪아 있죠.”
저항기질이 다분한 예술가의 통쾌한 사회비판을 들으며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그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아직 공산주의 국가에 사는 그가 저렇게 맘 놓고 아무 말이나 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숙청되는 건 아닌지 괜히 내 속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들러달라며 내 수첩에 자기 웹사이트 주소를 적어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읽던 책을 집어 들고는 케루악의 여정으로 돌아갔다.
이코노미 클래스 창가 자리에 홀로 남겨진 나는 수첩에 쳐진 줄을 무시한 채 또박또박 적힌 그의 가상 세계 집 주소를 들여다봤다.
그곳에 찾아가면 나와 이야기를 나눈 그가 아닌 그의 정신을 담아낸 작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 어떤 오브제를 사용해서 연출해냈을지, 그가 표현하려는 사상은 어떻게 변해갔을지, 그 역사가 궁금해졌다. 당장 알아내려면 알아낼 수도 있었지만 지상에서 1000km 위를 비행하는 동안에 사용하는 인터넷은 꽤 값비싼 비용을 치러야 했으므로 나는 그제야 내 원래 계획대로 <길 위에서1>을 펼칠 수 있었다.
한국어로 잭 케루악의 여정에 겨우 동참하게 된 셈.
중국어로 훨씬 앞서 떠난 옆의 남자를 보니 왠지 전투력이 상승, 더 속도를 내어 따라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3_
남자는 허겁지겁 서둘러 커피를 마시려다가 뜨거웠는지 머금었던 것을 다시 종이컵에 뱉어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여기까지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뭘요. 덕분에 비행 즐거웠어요. 저에게 말했던 많은 이야기들 작품 속에서 발견해낼 수 있길 기대할게요.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님의 외침이 큰 울림으로 세계 속에 퍼져 나갈 수 있기를 바랄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힘이 나네요.”
“베를린에서도 열심히 하시고요!”
“네, 저 먼저 갑니다.”
남자가 탑승구로 빨려 들어갔다. 바깥에 비를 맞고 선 비행기의 어느 좌석 하나에 앉아 다시 안전벨트를 매고 스키폴에서 멀어질 것이다.
암스테르담 국제공항, 스키폴.
나는 이곳에서 다음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세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정된 공간에 계속 머물러 있다는 건 즐겁지 않지만 그게 공항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곳에는 어디론가 가려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그들의 얼굴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생생하게 스쳐지나간다.
깔끔한 양복을 입고 빛나는 구두를 신고 한 손에는 서류가방을 들고 귀에는 블루투스 미니 헤드셋을 끼고 알 수 없는 낯선 언어를 읊조리며 분주하게 걸어가는 비즈니스맨, 커다란 헤드셋을 끼고 지친 눈을 감고 앉은 여행자, 싸움이라도 했는지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커플, 아직도 그렇게 좋은지 잡은 손을 놓지 않는 백발의 커플, 우리 사랑에 빠졌다고 광고라도 하겠다는 기세로 서로의 몸에서 손을 뗄 줄 모르는 어린 커플, 멍하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각계각층의 나홀로 여행자... 그들을 바라보며 눈빛과 몸짓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남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게 지루해질 무렵 나도 스마트폰을 꺼냈다.
와이파이에 연결되자마자 한국에서 날아온 메시지들이 도착했다고 소리를 냈다.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당황한 나는 서둘러 진동으로 바꿨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는 괜스레 주변 사람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다가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을린 얼굴, 평범해 보이는 옷차림의 그가 나에게 미소 지었다.
나도 미소로 화답하고 다시 내 스마트폰으로 눈을 돌리려는데 그의 옆에 놓인 가죽 배낭에 매달린 조개껍데기가 눈에 띄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살굿빛이 감도는 가리비 껍데기.
그 위에는 빨간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다.
저건...
아, 그 길!
남자는 '그 길'을 걸은 사람이다.
나도 언젠가 걸은 적이 있는 '그 길'을 말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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