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愛, 로路, 소설小說 01 바르셀로나

_ 결심

by Snoopy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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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데 산티아고에 대해 처음으로 듣게 된 건 제이미와 헤어지고 칠 개월쯤 지난, 그래도 아직은 런던에 적을 두고 있었던 때였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좌절과 실연의 아픔에 허덕이던 시절이다.

그때는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은 직장이 있다는 사실만이 단 하나의 위안이었다.

우울한 날이면 의례히 그러듯 그날도 퇴근 후 닉을 불러내어 펍에서 시원한 기네스 맥주로 목을 축였다.

아일랜드 출신인 닉은 고향의 펍에서 마시던 기네스의 맛을 따를 곳이 없다며 이곳의 기네스를 폄하했지만 아일랜드는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나로선 그나마 주변의 어떤 곳보다 이곳의 기네스 맛이 제일 낫다며 정 고향의 기네스가 맛있음을 증명하고 싶다면 한 번 나를 고향으로 데려가라고 말하며 낄낄거렸다.



펍에는 나 같이 낄낄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셨다.

저마다 낄낄거림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젯밤의 섹스 상대가 죽여서 맘에 들었는데 원나잇이었으니 연락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쇼크라든지, 상사의 괴롭힘을 참다 참다 직원들이 다 보는 가운데 면전에 욕지거리를 한 뒤 짐을 싸서 나왔다든지, 잘난 척 하는 동료가 아니꼬웠는데 바람을 피우다 배우자에게 걸려 고소하다든지, 승진해서 봉급이 올랐다든지, 응원하던 축구팀의 승리 혹은 패배…….

펍에서 일어나는 대화의 종류는 무궁무진했다.

검은 색깔답게 맛은 쌉쌀하지만 입 속에서는 부드러운 기네스 한 모금이 내 목구멍을 살짝 쏘며 넘어갔다.


젠장, 그 인간이 또 연락했다.


“이번엔 뭐래?”

“응?”

“제이미한테 연락 온 거 아냐?”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바보냐? 걔한테 연락 오면 늘 날 펍으로 불러내서 기네스 마시며 널 내 고향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곤 웃어젖히는 거 네 행사잖아.”

“그랬나? 싫었다면 미안해.”

“아니야. 싫긴. 그냥 안쓰러워서 그래. 제이미 지금은 샹하이에 있던가?”


제이미가 이제 7개월이나 지났으니 우리 친구할 수 있는 거냐고 물어왔다.

그가 그렇게 물으면 꼭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대화가 조금만 더 진행되면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대화는 이별하던 때 나누었던 대화와 비슷하게 흘러가다가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내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그를 잊지 못하고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일까?

여태 흘린 눈물만 모아도 와인 열 병은 족히 채웠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끝난 것처럼 한숨까지 쉴 필요는 없잖아.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서 그래.”

“얼마나 더? 그리고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세라, 세상에 널리고 깔린 게 남자야.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내가 다른 놈 하나 더 소개시켜줄까?”

“됐어. 너 아니었으면 제이미 만날 일도 없었잖아. 그때 왜 날 파티에 초대해가지고......”

“또 이런다. 크리스한테 전화해줄까? 사과하라고?”

“알아. 제이미는 크리스 친구였던 거. 잊을 만하면 그 인간이 나타나 말을 걸어서 모든 감정을 되돌려 놓아서 그래. 너도 알잖아. 벌써 네 번째야. 기억 나? 두 번째였나? 다른 여자랑 찍은 사진 보내서 나 죽어버린다고 한바탕 난리 났던 거.”

“하하하, 당연하지. 그날 일요일이었는데 갑자기 인터넷이 안 된다며 우리 집에 왔다가 모니터를 보며 칼 들고 죽겠다고 난리치던 널 내가 말렸잖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이미가 너무 심했어. 너와 헤어지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렇게 사진을 보내오다니. 너랑 걔랑 결혼할 뻔했던 사이였잖아.”

“그 이야긴 말자.”

“그런데 너 정말 제이미랑 연락을 끊을 생각이긴 해? 만약 내가 너였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경로를 차단했을 거야.”

“알아. 솔직히 내 가슴 깊은 곳에선 그가 말을 걸어주길 원하는 걸까. 아, 정말 모르겠어. 나 왜 이러는 거야?”

“모르지. 내가 네 속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건 네가 아직 그를 잊지 못했다는 사실이지.”

“지금은 그나마 거리가 있어서 버티고 있지만 이제 나 비자 만료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샹하이랑 서울이 샹하이랑 런던보다 훨씬 가깝긴 하지.”

“나 정말 어떡하지?”

“일단 네가 돌아갈 즈음엔 그녀석의 계약이 끝나서 영국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지 뭐. 그리고 네가 정말 한국에 가기 싫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응?”

“내 친구 중에 돈을 지불하면 혼인신고나 동반자비자로 영국에 계속 있게 해주는 일을 잘 아는 녀석이 있는데......”

“야! 됐고.......”


갑자기 서러움과 술기운이 한꺼번에 올라와 눈물로 흘러내렸다.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던 닉은 지금 내게 필요한 가장 적절한 치료방법일지도 모르겠다며 갑자기 떠올랐다는 이상한 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길은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에서 스페인 북부를 가로질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지나 당시의 사람들에게 세상의 끝이라고 불린 피니스테레까지 이어지는 길로, 예수의 12 제자 중 하나이자 스페인의 성인 야곱이 예수 사망 후 복음을 전파하며 걸었다고 했다.

사실 그런 종류의 길이 이태리의 로마를 비롯해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까지 기독교 성지라면 전역에 퍼져있다고 하는데 그중 요즘 가장 유명한 길이 스페인에 있는 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야곱의 무덤이 있다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800km에 이르는 긴 길을 대략 한 달을 걸려서 배낭을 메고 걸어간다고 했다. 그 긴 길을 걷고도 마음이 동하면 땅 끝까지 추가로 100km를 걷는다고.


“뭐? 아니, 비행기 여행이 일상화 된지는 이미 오래고 우주여행에 대해 꿈꾸는 이 시대에 걸어서 여행을 다닌다고?”

“응. 그렇다고들 하더라.”

“말도 안 돼! 혹시 시간 많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다니는 길 아니야?”

“아니야, 나도 그 길에 대한 이야길 처음 들었을 땐 너 같은 반응이었어. 내 주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인생이 피폐해진 친구들이 몇 있었거든. 그런데 그 길을 걷고 돌아오더니 마음의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했는지 정말 달라져 있더라고.”

“왜, 도인이라도 되어서 돌아왔든?”

“뭐 꼭 꼬집어서 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뭐랄까, 얼굴이 편해졌다고 할까? 너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지.”

“야, 내가 뭐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한국 돌아가면 적응해야지, 바로 취업해야지 안 그러면 집에서 폭풍 잔소리는 기본이고 주변사람들한테 병신 소리 듣는 거 금방이야. 이제 내 앞엔 지옥문이 열렸다고.”



그 대화가 있고 나서 꼭 석 달 뒤에 비자가 만료됐다.

그렇게 나는 패잔병의 꼴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닉과 나의 바람과는 달리 제이미는 여전히 진지한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중국 여자가 사는 도시 샹하이에 거주 중이었다.

그런 그가 내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제 이웃 나라에 살게 됐는데 친구 할 수 있는 거냐고.


드디어, 그리고 마침내 나는 제이미를 모든 메신저에서 차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비규환의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었다.

가족들은 나를 무슨 끔찍한 사고라도 당하고 돌아온 사람인 것처럼 조심스럽게 대했다.

집에 있을 때면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 딸 불쌍해서 어쩌니’의 눈물을 글썽였고, 아빠는 내 눈치만 살필 뿐 말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그 자체가 너무 심한 스트레스라서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사 년도 넘는 세월을 외국에서 보냈으니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되도록 빨리 안정적인 삶의 방식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기분도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내가 흘린 눈물은 이제 와인 열한 병 정도로 늘어났다.

그런 와중에서도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보내고 그 사이 사이 아이들 영어 과외해준 돈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원하던 취업은 쉽지 않았다. 몇 개월을 수많은 회사로 이력서를 보내는 데 전력투구했지만 면접까지 간 것이 다였다.

그나마 동생만이 이따금 말벗이 되어주었는데, 그녀마저 옆방으로 떠난 깊은 밤에는 혼자서 나의 감정을 무디게 해주길 바라며 투명한 액체를 들이켰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나는 자꾸만 제이미와의 삼 년이라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지기 시작했는지, 사소한 말실수 하나까지 그 시간들을 서슬이 퍼렇게 갈린 칼로 헤집고 다녔다.

멈추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지만 멈춰지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비워진 투명한 초록색 병들의 잔해를 가족들 몰래 버리던 이른 아침, 정말 더 이상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단 집에서 나가 어디로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면 되겠지. 영화라도 한 편 볼까. 서점에 가볼까. 백화점에 들러 쇼핑이라도 하며 기분을 전환해볼까.


단 하루라도 좋으니 제이미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세수를 하고 아무 옷이나 집어 입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절대 오늘만큼은 있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초록색 유리병 두어 개와 안주거리를 산 뒤 가방에 숨겨 방으로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방학을 맞은 여름날의 서점은 에어컨 바람을 쏘이기 위해 나온 아이들과 학생들로 유난히 북적이는 것 같았다.

진열대는 여행과 바캉스에 대한 정보서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표지와 활자의 화려한 색깔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나도 잠시 어디라도 좋으니 떠나버릴까 싶어 책장을 살피다 ‘카미노’란 단어를 발견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아하, 그때 펍에서 닉이 이야기했던 그 길!


뽑아서 살펴보니 어떤 여자가 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순례 여정에 대한 책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누군가 걸은 사람이 있다니 놀라웠다.

서점 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용이 꽤 흥미진진했다.

세계에서 각자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그 길로 모여드는 듯했다.

안 되겠다는 기분이 들어 바로 계산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침대 위에 쭈그리고 앉아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책을 읽는 내내 비장한 기분이 들더니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그래, 이건 신의 계시나 다름없어. 나도 그 길을 걷자. 거기서 제이미를 잊고 오는 거야.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