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내게 네가 필요하다고해서 너의 길을 막을 수는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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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와 손을 잡고 횡단보도 앞에 건너려고 서있는데 누군가 리모콘으로 세상이라는 티브이에 대고 음소거 버튼이라도 누른 듯 갑자기 조용해졌다.
주변의 공기도 급작스레 이상해져 무언가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더니 한 집시여자가 내가 다가와 덥석 내 손을 잡더니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을 중얼거렸다.
나는 너무나 놀라서 움직일 수 없었다.
주변에 서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녀는 계속 소리 지르듯 무언가를 내게 외쳐대는데 나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으로부터 알 수 없는 힘이 뿜어져 나와 내 눈으로 흘러들어와 전신을 타고 발톱까지 내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꼭 그녀에게 내 자신을 투시당한 기분.
이윽고 그녀는 잡았던 내 손을 뿌리치더니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많은 사람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갑자기 하늘에서 손가락 한마디 굵기의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비의 공습에 놀란 사람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집시여자도 사람들 틈에 섞여 사라지고 없었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알베르토는 얼이 빠진 듯 섰던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비도 피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에 들어왔지만 나는 여전히 방금 일어난 일 때문에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세라, 괜찮아? 와, 이런 비는 처음이야.”
“어? 아, 응. 그냥 좀 놀라서 그래. 아까 그 집시여자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혹시 알아들었어?”
“흠. 그냥 비가 올 거라고 한 거야. 미친 여자가 한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정말이야? 그게 다야? 그런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린 거야?
부탁이니까 알아들었으면 무슨 말이었는지 다 이야기해줘.”
“사실은 비가 온다는 말 이전에 이상한 말을 했어.
네가 떠나야 한다고 했어.
길을 떠나지 않으면 찾으려던 그 무언가를 찾을 수 없으니 즉시 떠나야 한다고 했어.
길에서 네가 이상한 것들을 만나게 되는데 당황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도 했어.
있는 그대로를 믿으랬어.
운명을 거스르지 말고 얼른 떠나래. 비가 내릴 거고 그 비를 뚫은 너는 새로운 세계에 닿을 거라는 말도 했어. 집시만의 억양이 워낙 심해서 나도 완벽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의 내용은 그거였어.
그러더니 정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그 여잔 사라져버렸지.”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옛날에 떠돌던 터무니없는 미신처럼 집시들은 미래를 볼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내가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을 포기하고 알베르토와 바르셀로나에 있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내가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이 운명으로 정해져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새로운 세계라는 말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바르셀로나를 떠날 때가 왔다는 것.
사실 알베르토와의 관계도 이제 막다른 골목에 이른 기분이긴 했다.
지금은 회사에 다니지만 그러면서 차곡차곡 모은 자신의 힘이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일조하길 갈망하는 이 젊은 남자는 앞으로 아주 먼 길을 가야 한다.
그는 내게 함께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사실 만난 지 이 주밖에 되지 않은 사람에게 어딘가 먼 길을 함께 가자고 말하는 것도 웃기는 일일 것이다.
어쨌든 그 길은 아직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스스로 헤쳐 나가야하는 길이라서 내가 무턱대고 따라나설 수도 없었다. 나 역시 정해진 나의 길이 있지 않은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알베르토는 묵묵히 내가 짐 싸는 걸 도와줬다.
나는 우리 둘의 관계는 이쯤에서 끝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면서도 그가 한 번이라도 꼭 떠나야 하느냐고, 같이 있어주면 안 되냐고 물어봐주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참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흐느낌이 점점 커졌다. 보다 못한 알베르토가 나를 확 껴안았다.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 그리고 내가 우는 모습은 네 기억에서 지워줘.”
“떠나는 사람은 너잖아. 그러니까 울지 마. 남겨진 사람이 더 힘든 법이야.”
“떠날 걸 알면서 왜 나한테 잘해줬어?”
“이런 적이 없어서 나도 몰라.
공항에서 널 봤을 땐 그냥 친구의 부탁대로 내 집에서 지내는 동안 편하게 있게 해주고 싶었어.
그런데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네가 필요해졌어.
아까 집시여자의 이야길 들은 네 눈에서 반짝이는 빛을 봤어. 네가 떠나야 한다는 걸 직감했지.
그래, 난 나의 길이 있고 너는 너의 길이 있어. 내게는 너의 길을 막을 자격이 없어.
내게 네가 필요하다고해서 너의 길을 막을 수는 없는 거라고.”
“그래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니......다만 지금 내가 흘리는 눈물은 기억하지 말아줬으면 해.”
“네 우는 모습은 이대로 기억할거야. 내 기억의 주인은 나고 지금 이 순간이 내 기억의 일부이기도 하니까.
길을 걷다 힘이 들면 언제든 돌아와. 난 여기 있을 테니.”
“내가 길을 다 걸으면 돌아오길 바란다는 거야?”
“대답할 수 없어. 다만 난 네가 너의 길을 가길 바랄 뿐이야.”
***
새벽이 되어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오르기 위해 팜플로나Pamplona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갈 때에도 여전히 비가 내렸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알베르토와 긴 키스와 포옹을 나눌 때만 해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버스에 오르고 알베르토는 점점 작아지고 그가 뒤돌아서는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갑자기 찾아든 혼자가 됐다는 생각 때문에 울기 시작했다.
이제 그를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자 더 서럽게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휴지 한 통쯤을 다 쓸 만큼의 눈물 콧물을 뽑아내고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버스 기사가 휴게실 같은 곳에 차를 세우더니 스페인어로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행이 옆에 있던 캐나다인 부부가 20분 뒤에 버스로 돌아오라는 말이라고 통역해줬다.
이제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옆에서 무슨 말인지 알려줄 알베르토가 없으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스페인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다, 처음인데 당연하다.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팜플로나에 도착하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쳤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힘들게 순례자를 위한 숙소인 알베르게를 찾았다.
그곳에서 순례자 등록을 하고 일종의 신분증을 받았다.
지금은 거의 텅 비어있지만, 앞으로 매일 차곡차곡 증서 위에 내가 걸어 나간 길들의 자취가 스탬프라는 형태로 기록될 것이다.
침대를 배정받자마자 우체국의 위치와 문 닫는 시간을 물어본 뒤에 서둘러 필요 없는 짐을 모조리 꺼내 우체국에 가져갔다.
이제 나는 여행자가 아닌 순례자가 됐으니 가방 속의 짐으로 내 어깨를 짓누를만한 모든 물건을 미리 산티아고 우체국으로 보내야 했다.
고맙게도 그들은 앞으로 두 달간 나의 물건을 보관해줄 것이다.
큰 문제를 무사히 해결하고 낯선 도시를 어슬렁거렸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거리로 둘러싸여 누가 봐도 아주 오래된 도시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다.
좁고 복잡한 골목골목에서 나는 자꾸 길을 잃어버렸다.
그러느라 내일 먹을 식량을 사야하는데 슈퍼마켓이 일찍 닫는다는 사실도 깜빡했다.
그나마 겨우 찾은 과일가게에서 몇 알의 천도복숭아를 샀다.
배가 고파져서 도시를 돌아다니던 중 저녁으로 타파를 먹기로 했다.
주문을 하려고 바에 서있는데 아무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내 뒤에 들어온 사람들은 음식을 시켜서 잘만 먹었다.
또 다시 울컥 서러워졌지만 마음을 다잡고 웨이터를 불러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겨우 음식과 와인을 시켰다. 배를 채우고 숙소로 돌아가니 앞으로 나의 동지가 될 순례자들로 북적였다.
기쁜 마음에 말 시킬 사람을 찾아보지만 운이 나빴던 건지 영어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길을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다.
그냥 바르셀로나의 알베르토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내일은 괜찮아질 거야.’
강렬한 희망으로 머릿속에 쌓아둔 알베르토에 관한 그리움을 단박에 격파하고는 눅눅한 공기를 타고 스멀스멀 내 콧구멍으로 기어들어오는 파스냄새와 빨래가 말라가는 냄새를 맡으며 잠을 청했지만 쉽지 않았다.
쿰쿰한 어둠은 자꾸만 잠을 내쫓고 그 자리에 과거를 가져다 놓았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