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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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아직 깜깜한데도 일제히 일어나 맹렬히 부스럭거리며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긴장한 탓인지 나도 벌떡 일어나 부스럭 소리의 행렬에 동참했다.
바깥에 나오니 도시 사람은 아무도 없고 순례자들만이 산티아고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조가비 모양의 표식과 노란 화살표를 쫓아가면 된다고 했지.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가방이 벌써부터 무겁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와우, 이 정도면 아주 멋진 출발이군.'
무거운 발걸음에 미적거리는데 덴마크에서 왔다는 커플을 만났다.
아침이나 함께 먹고 가자고 청해서 잘 됐다고 생각하고 따라 들어갔다.
하루 종일 걸어야 하니까 속을 든든하게 채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맛있어 보이는 커다란 초콜릿이 발라진 크루아상과 그 자리에서 바로 짜주는 신선한 오렌지주스를 큰 사이즈로 시켰다.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덴마크 커플은 영어를 잘 못해서 무언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덴마크에서 직접 가져온 뛰어난 맛의 치즈와 초콜릿을 벌써 다 먹어간다며 그들이 슬퍼하는 와중에 나의 크루아상의 크기가 줄어들고, 큰 컵의 주스도 줄어갔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주스를 다 마셔갈 즈음 컵의 바닥에서 무언가 힘없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것을 발견했다는 거다. 불안했지만 그래도 자세히 보기 위해 다시 컵을 흔들어봤다.
바.퀴.벌.레.
헛구역질이 나오고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덴마크 커플은 그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듯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바퀴벌레는 추가로 섭취하는 고단백질일 뿐이라고 말했다.
정말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당장에 주인에게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스페인어가 되지 않는 나로서는 꿈에서나 가능한 일.
너무 화가 나는데 맞장구 쳐주는 사람조차 없어서 더 화가 나고 서러웠다.
아침부터 모든 징후들이 이 길을 굳이 걸어야겠느냐고 물어보는 것만 같았다.
자꾸 눈물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데 꾹꾹 참았다.
이제 되도록이면 울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가슴에 해소되지 않은 분노를 품은 채 비참한 심정으로 길로 돌아왔다.
설상가상으로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땀인지 빗물인지 정체불명의 액체로 옷을 흠뻑 적시고 배낭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나마 떠오른 긍정적인 생각이라곤 아침에 바퀴벌레가 입속에서 발견되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는 사실. 혹시라도 만약 그랬다면 정말이지 모든 음식을 말끔히 게워냈을 것이 분명하니까.
점점 날이 밝아오고 도시의 냄새로부터 멀어져갔다.
뜨문뜨문 길게 이어진 순례자의 행렬이 부슬비에 흐릿해져 보였다.
드넓은 들판 사이로 난 황토색 길 위의 사람들.
다가가서 보니 넓은 들판은 해바라기 밭이었다.
한여름에 태양을 향해 아름답게 빛났을 해바라기들은 이제 눈부시게 작열한 뒤 진한 고동색으로 말라버렸다.
해바라기, 하면 커다란 키에 해를 닮은 진노랑의 얼굴로 태양을 향해 서있는 진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이미지로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끝도 없이 이어진,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고개 숙인 해바라기의 시체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곧 다시 내년 여름이 되면 파란 하늘 아래 눈부시게 피어 무거운 배낭을 지고 고통스럽게 이 길 위를 걸어가는 순례자들에게 휴식 같은 미소를 짓게 해줄 거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비는 주구장창 내렸다. 비가 겨우 잦아드는가 싶으면 진흙바닥이 나를 괴롭혔다.
신발 위로 진흙커버가 생겼다.
그 커버는 걸으면 걸을수록 진흙이 추가로 달라붙어 점점 더 커지고 무거워졌다.
겨우 그것들을 떼어내도 진흙은 악착같이 다시 달라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를 지치게 했던 건 말이 통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점이었다.
사람들 자체는 모두 친절하고 상냥했지만 나에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계속 두리번거리다가 그라나다Granada에서 왔다는 호세와 말도 안 되는 스페인어로 대화를 시도해봤다.
인사 정도였지만 그냥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마침내 진흙의 괴롭힘에서 벗어났을 즈음 순례자가 걸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늘어선 산 정상에 섰다. 세상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리고 바퀴벌레 사건 이후 내 위장에 한때 존재했던 음식이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준비한 음식으로 요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배가 고팠다.
너무 준비 없이 무작정 이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정말 내가 이 길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더 멀리 걸어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그냥 여행을 그만둬야 할까 따위의 아침에 꾹꾹 눌러뒀던 마음 약한 생각들이 줄줄이 새어나오는데 호세가 빵에 토마토와 치즈, 햄을 넣은 샌드위치를 내밀며 먹으랬다.
난생 처음으로 만나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다니.
“고마워. 배고팠는데.”
“뭘. 난 가방에 짐 줄여줘서 고맙지. 맛있을지 모르겠다.”
원래도 그랬겠지만 배고픔과 근사한 경치 덕에 더 맛있게 샌드위치를 먹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혹은 누군가와 함께 이 길을 걸었다.
하지만 결국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자신이다.
인생길을 혼자 걸어야 하듯, 산티아고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중도에 포기는 할 수 있지만 누군가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그 길을 걸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끝까지 해보자는 용기가 생겼다.
혼자 걷는 이 시간을 즐겨보기로 결심하고 다시 배낭을 멨다.
그러나 새로이 솟아오른 용기나 나의 결심과는 상관없이 거대한 배낭이 여전히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눌렀다.
그래도 열심히 걸은 보람이 있어서 마침내 한 마을에 도착했다.
다른 순례자들 모두 선술집 같아 보이는 어떤 곳에 길게 배낭을 세워뒀다.
오늘 밤 이곳에 머물기 위해 기다리는 건지 아님 그냥 휴식을 취하려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가이드북에는 이곳에 알베르게가 있다는 정보만 나와 있을 뿐 얼마큼 걸었으니 이제는 쉬라든가 좀 더 걸어가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격려의 말 같은 것은 적혀 있지 않았다.
누군가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두 자신을 돌보느라 바빴다.
소심하게 밖에서 손톱을 깨물며 서성이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기에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기로 했다.
아까 점심을 먹을 때 옆에 있던 여자가 보여 말을 걸었다.
천만 다행으로 그녀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옆에 서있던 남자는 남편으로 캐나다인이라고 했다.
드디어 의사소통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나는 물고기가 제 물을 만난 것 마냥 기뻐서 이야기를 쏟아낸 끝에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오늘 어디서 잘 거야? 이 마을에 알베르게 있어?”
나의 질문에 당황한 듯 소냐와 마이크는 알 수 없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들은 특별한 알베르게로 갈 예정이며 이를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걸었다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동그래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만 봤다.
둘은 자꾸만 내 눈치를 보며 알 수 없는 눈빛을 교환하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하더니 내게 몇 km를 더 걸을 힘이 남아 있다면 함께 가자고 했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