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숨바꼭질하는 성당에서의 신비로운 하룻밤
마을을 빠져나와 꽤 긴 길을 걸었다.
어쩌면 배고픔과 배낭의 무게 때문에 멀리 걸었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배고픔은 정말 극에 달해서 옥수수 밭 옆을 걸으며 저 안으로 뛰어들어 생 옥수수라도 뜯어먹어야 하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가방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고 만약 그곳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잠이야 어디에든 몸을 누이고 자겠지만 꼼짝없이 쫄쫄 굶어야하는 신세였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옥수수 밭의 위치를 잘 파악해뒀다.
만약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되면 다시 찾아와 저거라도 뜯어 먹어야 하리라.
고픈 배도 문제지만 배낭은 점점 무거워졌다.
장난꾸러기 요정이 일정시간이 지나면 보이지 않는 돌덩이를 하나씩 넣는 것이 분명했다.
다리는 왜 걸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그냥 무작정 걸음을 옮기고, 발은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옥수수 밭 너머로 웬 건물이 보였다.
묵묵히 함께 발걸음을 재촉하던 커플이 우리가 갈 곳이 바로 저기라고 기뻐했다.
성당이라고 한 것 같은데 그간 내가 봐온 성당과는 무언가 달라 보였다.
첨탑이 보이지 않고 건물의 규모도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제일 이해할 수 없던 부분은 분명 처음에 발견했을 때는 성당이 들판만 가로지르면 금방 도착할 것 같았는데 길을 따라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거나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그곳이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며 장난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다고 머리를 흔드는데 함께 걷던 커플도 성당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고 불평을 늘어놓아서 마음이 놓였다.
길고 지루했던 건물과의 이상한 숨바꼭질 끝에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선 우리를 맞아준 것은 휑해 보이는 성당이었다.
삭막하게 허허벌판에 이상하게 생긴 팔각형의 첨탑도 없는 교회가 돌 아치에 둘러싸였다.
나름대로 신비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긴 한데 피곤하고 힘들어서인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드민 태양이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알베르게의 입구를 찾았다.
앞에서 이제 어떡해야 하냐고 수군거리는데 이 알베르게를 지키는 오스피딸레로가 나타났다.
그는 우리를 휭 하고 둘러보더니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진흙으로 완전 더러워진 신발을 벗어놓고 들어갔다.
그는 우선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게 하더니 부엌으로 우리를 데려가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를 대접했는데 그 상큼한 맛이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타는 갈증은 물론이고 그간 쌓인 피로를 단박에 회복시켜주는 것 같았다.
곧 그들은 한참동안 스페인어로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언어를 이해할 수 없던 나는 이 신비한 음료의 정체를 탐구한답시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래서인지 마셔본 적은 없으나 신들의 음료라는 암브로시아 부럽지 않을 것 같은 풍미를 자랑하는 이 음료수를 연거푸 석 잔이나 얻어마셨다.
오스피딸레로가 우리를 방으로 인도하며 알베르게 시설을 보여줬다.
작은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곳은 일반 알베르게가 아닌 사설 알베르게로 사람들 사이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오스피딸레로는 프랑스인으로 언젠가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걷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이 집을 사서 알베르게로 변신시켰으며 지금은 내가 아까 보았던 팔각형 모양의 성당 열쇠지기이기도 하다고 했다.
뭔가 더 긴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지만 땀에 절은 순례자들의 몸이 샤워를 갈망했다.
샤워 후 한층 가뿐해진 몸으로 바라보는 성당은 아까의 그것과 사뭇 달라보였다.
천천히 건물을 돌면서 보니 벽에 아주 오래된 낙서도 보였다.
수백 년 전 이 길을 걸은 순례자들의 흔적이겠지.
교회 자체가 왕족의 무덤이기도 하다니 지체 높으신 분의 낙서일지도 모른다.
짧은 처마 같아 보이는 곳에는 이상한 모양의 얼굴이 잔뜩 조각되어 있어 음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걷다가 문득 습기가 차서 잘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게시판 같은 것을 보았다.
스페인어였는데 다행히 소냐가 옆에서 해석해주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으라. 맨발로 성당 주변을 세 바퀴 돌라. 한 바퀴에 성부, 한 바퀴에 성자, 한 바퀴에 성모의 이름을 간절히 세기며 마음을 경건하게 하라. 문을 열고 성전에 들어가라. 입을 열어 마음을 흩트리지 말지어다. 침묵 속에서 마주하는 네 안의 성령을 만나게 되리라.”
“뭔가 되게 심각한 걸? 내 안의 성령과의 만남이라. 우리 한 번 해볼래?”
금세 맨발이 된 나는 성부를 생각하며 성당 주변을 돌았다.
양말만 신은 소냐가 내 뒤를 이었고 마이크는 조금 떨어져서 그런 우리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한 바퀴에 한 가지 생각을 집중하며 도는 것뿐인데 한 가지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겨우 성부, 성자, 성모에 대해 집중하며 마음에 일렁이는 물결을 잠재운 뒤 삐걱 소리가 나는 나무 문을 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한 명의 신도만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중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간절하기에 이방인인 나에게까지 전해져 오는 것일까.
방해하기 싫어 얼른 아무데나 앉아서 눈을 감고 내 안의 성령과의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내 안에 무언가 존재하긴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고요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조바심이 마음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심호흡으로 조바심을 걸러내며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접촉을 시도했지만 끝내 성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세라, 어땠어? ‘네 안의 성령’은 만났어?”
“하하, 아니. 눈을 감으니 그저 캄캄하고 성당 안은 고요 그 자체더라.”
“걱정 마. 네가 원한다면 이 길을 걷는 한 분명 넌 네 안의 성령을 만나게 될 거야. 뜻밖에 네가 가장 원하지 않은 순간에 나타날 수도 있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종교는 없지만 이 길엔 분명 뭔가 있어. 천 년 전에는 대개 순수하게 종교적인 이유였을지도 모르지만 요즘 사람들은 굳이 종교적인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상에서 찾을 수 없던 대답을 구하러 이 길을 걸으러 와. 나와 마이크도 그 힘을 흡수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고.”
소냐가 마이크와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한참을 성당 내부의 특이한 구조와 조각을 살피느라 시간을 보냈다.
성지 수호자들로 알려진 템플 기사단이 지었다는 이곳은 앞에도 언급했듯 다른 성당과는 외양부터가 달랐다. 내부의 외계인 같이 생긴 조각부터 이국적인 식물의 모양까지 갖가지 기묘한 조각을 보며 옛날 사람들은 아마도 이곳에 들어와서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더 큰 신앙심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좀 더 깊이 그에 대해 생각하려는데 오스피딸레로가 저녁식사시간을 알렸다.
잠들어 있던 배고픔이 순식간에 눈을 번쩍 뜨는 바람에 서둘러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식탁 위에는 크림스프와 소면에 허브로 장식된 앙트레가 올려져있다.
그리고 독일에서 오랜 세월 선생님을 하시다가 은퇴하셨다는 새로운 순례자도 우리를 반겼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삽시간에 그릇을 비웠다.
메인에는 신앙심도 돈독한데다가,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이미 여러 번 다양한 경로로 걸으셨다는 독일 전직 선생님의 성령 충만한 순례자 모험 이야기와 붉은 포도주, 파스타, 감자요리가 올랐다.
이 길에 대한 수다가 저녁식사의 흥을 돋웠다.
모두 배부르다, 배부르다 하면서도 끊임없이 음식을 먹었다.
더군다나 프랑스사람답게 자신의 요리에 자부심이 강한 오스피딸레로는 레몬향이 나는 달콤한 크림과 익힌 사과, 계피가루가 어우러진 후식까지 내왔다.
이미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배불리 먹어서 더 못 먹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다들 맛있는 후식의 유혹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식사 후에 찾아간 성당에는 몇 개의 촛불을 제외하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고요함을 깨고 아름다운 아베마리아가 울려 퍼졌다.
내 앞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촛불이 놓였다.
사실 식사를 마치고 갑자기 일렬로 성당에 들어와야 했을 때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아베마리아가 울려 퍼지는 이 순간만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아베마리아가 끝난 뒤에는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작은 촛불을 바라보며 하루를 생각했다.
바퀴벌레를 먹을 뻔하고 난생 처음으로 무거운 배낭을 지고 20km도 넘는 거리를 걸었다.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벌써부터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다.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간절한 힘이 실린 기도가 프랑스어로, 독일어로 들려왔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더니 내 안 깊은 곳에서 아까는 아무리 노력해도 들을 수 없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음껏 울어라.
네 안에서 솟구쳐 오르는 그 어떤 감정도 막지 말고 표출시켜라.
너 자신을 믿고 걸으라.
그러나 멈추고 싶을 때가 올 것이다. 너를 두려움에 떨게 할 수도 있다.
결코 그 두려움에 좌절하거나 멈추어서는 안 된다.
다만 길이 너를 이끄는 대로 따를지어다.
이 길의 끝에서 또 다른 너와 마주하게 될 지니......'
목소리에 대한 화답으로 나는 나의 언어로 된 기도를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을 지배하시는 신이시여, 만일 당신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면 이 길로 나를 인도하시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 순간의 성령 충만함을 잊지 않게 해주옵고 그의 말대로 제가 이 길의 끝에 섰을 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끝까지 저를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저 뿐만 아니라 이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근심과 걱정이 아닌 기쁨으로 채워주시옵소서.
이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이 무사히 그곳에 도착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아멘.”
분명 익숙한 내 목소리지만 방금 나의 성대를 울려 입을 통해 터져 나온 목소리는 성당 안에 낭랑하고 아름답게 울려서 내 귀로 돌아왔다.
아멘의 끝에는 다소간의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고 마지막 의식으로 오스피딸레로가 성스러운 노래를 부를 즈음에는 근래 최고의 날을 보냈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반짝였다.
의식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모두가 원을 그리며 손을 잡았을 때는 원의 구성원이 종교를 믿고 믿지 않고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빗속을 뚫고 힘들게 도착한, 성지 수호대가 지었고 왕족의 무덤이기도 하다는 비밀스러운 성당에서 내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특별했다.
그 감흥을 함부로 깨기 싫어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라고 믿는다. 오랜 세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이 길로 불러들이는 힘의 근원도 분명 그 이런 특별함에 존재하는 것이리라.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