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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Jul 20. 2016

Cake_ Walk On By

Salt Lake City

20대의 나는 심각한 ‘금사빠’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나에게 빠졌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발견하는 순간 좋아하는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고나 할까. 이웃집 토토로에서 토토로들과 사츠키, 메이가 우산을 들고 씨앗들을 향해 의식을 치르니 그게 순간 거대한 나무로 쑥 자라나는 뭔가 드라마틱했던 꿈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리던 해, 그곳에서 가장 커다란 호텔에서 일했다. 정장을 입고 머리는 단정히 빗어 올리고 다양한 VIP를 상대하는 호텔리어를 상상하면 안 된다.

검은 바지, 하얀 와이셔츠, 검은색 나비넥타이, 하얀색 쟈켓...

연회장에서 음식을 나르는 나의 복장은 거의 펭귄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하지만 난생 처음으로 출근도장을 찍는 직장을 가지게 된 나로선 설레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호텔의 연회란 꽤 로맨틱한 구석이 있었다. 몇 시간 전부터 출근한 직원들은 손님들이 사용할 냅킨을 접고, 닦아둔 은식기와 물잔, 포도주잔을 세팅한다. 그리고 나면 테이블 위에 올라갈 빵을 바구니에 담고, 버터와 레몬을 규격에 맞게 잘라 그릇에 담아야 했다.

주방장이 분주히 음식을 장만하고 서빙할 담당 테이블을 정하고 음식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이어질 즈음이면 바텐더가 바를 세팅하기 시작한다.

솔직히 앉아서 먹는 사람이야 그냥 주는 대로 먹고 치워 가면 그런가보다 하면 그만이지만 그걸 하는 사람은 이만저만한 곤란을 겪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육체노동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던 나였기에 음식이 담긴 다섯 접시를 한 번에 나른다는 것이, 손님들이 다 먹은 음식을 그릇과 분리해서 차곡차곡 쌓아 주방으로 내가는 일이 녹록치 않았다. 도대체 접시는 왜 그렇게 두껍고 무거운지...

드나드는 문에 누군가 물을 흘려서 미끄럽다는 것을 모르는 채 무거운 그릇을 어께에 지고 휘청거리며 나가다가 결국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음악이 시끌벅적한 연회였기에 와장창 소리가 묻혔고, 카펫으로 날아간 접시들은 거의 깨지지 않았다. 넘어지며 부딪힌 엉덩이와 손이 너무 아팠지만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상황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매니저가 다가와 괜찮으냐고 물었을 때만 해도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다음 일을 해나갔다.

폭풍 같던 연회가 끝나고 테이블보를 걷는데 아까 넘어졌던 곳들이 아파왔다. 잠시 복도로 나와서 벽에 기대고 있자니 만리타국에서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도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려고 했다.


“괜찮아?”


누가 어께를 툭 치며 물어왔다. 눈이 파랗고 미소가 매력적인 금발의 바텐더가 내 눈높이에 키를 낮추고 서 있었다.


“응.”

“다행이다. 너 아까 크게 넘어졌는데 계속 일하기에 걱정했어. 무리하지 마.”


다시 어께를 툭 치고 춤추듯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그때였을 거다. 내가 그에게 반하게 된 건.

이후 난 그에게 ‘너의 눈을 본 순간 파랑색 나비가 내 마음속으로 날아 들어왔다’ 같은 굉장히 낯 뜨거운 문장과 ‘이곳에 있는 동안 나의 좋은 친구가 되어줘’ 같은 나름 귀여운 문장이 함께 들어간 편지를 건넸고, 우린 이따금 만나 수다 떠는 친구가 됐다.

처음 호텔 밖에서 만났을 때 그는 나를 하늘색 78년형 토요타 랜드 크루저에 태우고 솔트레이크 시티의 야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가는 길에 그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 거라며 <Comfort Eagle>이라는 앨범을 틀었다.


“케이크라고 알아?”

“혹시 ‘양은 천국 가고 염소는 지옥 간다(Sheep Go To Heaven)’라는 노래 부른?”

“어, 아는구나!”

“맞구나! 응, 엑스파일을 좋아하는데 거기에 나왔던 곡이거든.”

“그래, 이게 걔들 앨범이야. 네가 말한 노래는 다른 앨범에 있는데 난 이 앨범을 가장 좋아해. 잘 들어보라고.”


그가 볼륨을 높였다. 깜깜한 밤의 도로 불빛이 엔진소리와 존 맥크레아의 목소리와 뒤엉켜 지나갔다.

엔진 소리가 멈춘 뒤에도 우리는 차 안에서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며 그들의 음악을 들었다. 이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며 로모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잠깐 나갔다가 거센 칼바람에 따귀만 잔뜩 맞고 비명만 지르다 차 안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바람을 맞고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서로의 머리카락을 보며 얼마나 깔깔거렸던지.

존 맥크레아가 너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싶다(Love you madly)고 부르짖을 때였다.


“우리 같이 케이크 콘서트 갈래?”

“언젠데?”

“두 달쯤 뒤야. 내가 벌써 티켓을 구해뒀지.”

“좋아!”


그 뒤로도 우리는 이따금 밖에서 만나 케이크의 음악을 듣거나 마일즈 데이비스를 들었다. 

어느 날은 그가 만들어주는 참치 마요네즈 샌드위치를 먹었고, 어느 날은 담배 연기 뒤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봤다. 그의 방에 걸린 기하학적인 신비한 문양으로 가득한 그림을 들여다봤다. 

그의 몸에 새긴 여덟 개의 문신에 대한 추억을 들려준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나에게 다음 만날 때까지 실컷 들으라고 CD를 빌려줬다. 

나는 그렇게 ‘금’세 케이크라는 밴드와 나를 그들 음악세계로 인도한 그를 향한 ‘사’랑으로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고 그 사이 많은 호텔의 연회를 치른 덕분에 음식이 담긴 메인 접시 다섯 개 정도는 거뜬히 들고 무리 없이 서빙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케이크라는 밴드의 모든 앨범을 좋아하게 됐다. 

반면 그는 형의 가게 일이 바빠지는 바람에 호텔 일은 그만두게 됐다. 올림픽을 앞둔 호텔에는 서버들이 대폭 늘어나게 됐고, 그가 그만 두기 전 그가 새로 들어온 서버 중에서 모든 남자 직원들의 주목을 받았던 예쁜 그녀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내 눈에 포착되곤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시내의 단골 샌드위치 집에서 우연히 그를 맞닥뜨렸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끝에 그가 나에게 건넨 말.


“나 케이크 콘서트 못 가게 됐는데 너 혹시 가고 싶은 친구 있으면 같이 갈래? 나한테 있는 표 너에게 팔게.”


호텔을 그만둔 뒤 얼굴 보기 힘들어져서 콘서트 때 만날 것을 기대했던 터라 실망스러웠지만 애써 침착하게 그러겠다고 했다. 난 케이크의 음악에 빠져들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동계올림픽이 한창이던 2002년 2월 21일, 새벽 다섯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 정신없이 일하던 나날 중에 케이크의 콘서트가 열렸다. 콘서트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할리데이비스 좀 몰아봤다, 싶은 건장하고 몸에 그림이 많은 아저씨들이 맨 앞에 포진해 있었고 그들이 보기엔 하도 작아서 우스울 나와 내 친구가 그 사이에 ‘낑겨져’ 있었다.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는 건 그날 김동성이 억울하게 안톤 오노에게 금메달을 뺏긴 날이었기 때문이다. 친구와 나는 울분을 토하다가 주위의 어께 형님들의 시선을 느끼곤 바로 깨갱하곤 둘이서 구시렁거리기만 했을 뿐...

억울한 패배는 잊고 콘서트나 즐기자는 마음에 와, 사람 많다 하고 둘러보다가 낯익은 얼굴 둘을 발견했다.

콘서트에 올 수 없게 됐다던 그,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예쁘고 인기 많은 그녀.

눈이 마주치던 순간 흔들리던 눈빛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 뭔가를 설명하려 했던 것 같지만 순간 공연장에 불이 꺼지고 주인공 케이크가 등장해서 공연을 시작했다.

나도 머릿속의 스위치를 내렸다.

그곳엔 음악과 열기와 환호만이 있었을 뿐.     


***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아 짐을 정리하다가 그로부터 빌린 CD들을 발견했다. 

돌려주고 가야겠구나 생각하며 그중에 케이크의 앨범 하나를 틀어놓고 하던 일을 하다가 어느 한 노래에서 넋이 나가고 말았다. 



걸어 지나가, 네가 여전히 사는 집을

걸어 지나가, 우리가 키스하려던 곳을 그리고 내가 널 꽉 끌어안았던 그 방을

나는 오늘 밤 걸어 지나가야만 하네.     


그냥 그가 일하는 사무실로 찾아가 물건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집 앞을 지나야 하고 우리가 함께 음악을 들었던 벤치 앞을 지나야 했다.     


걸어 지나가, 네가 잠들어 있는 방을

걸으며 지나가, 네가 운영하는 회사를 그리고 내가 널 꽉 끌어안았던 그 방을

나는 오늘 밤 걸어 지나가야만 하네.     


차라리 밤늦게 찾아갈까. 그리고 집 문 앞에 짧은 노트를 붙여 두고 올까. 고마웠다고, 잘 지내라고.     


그냥 알 것 같아,

난 널 잊지 않을 거야, 아냐, 아냐, 아냐, 잊지 않을 거야.

넌 날 잊지 않을 거야, 아냐, 아냐, 아냐, 잊지 않을 거야.

난 계속 이곳으로부터 걸어가려 해.

그리고 다른 편에 닿으면 널 잊을 거야.     


‘금사빠’에게도 순정은 있었으니 과연 그를 쉽게 잊을 수 있을까. 

그 또한 아시아인으로선 첫 친구였던 날 금세 잊진 못할 거다. 

아니, 잊지 못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희미해질 테지.     


걸어 지나가, 네가 여전히 사는 집을

걸어 지나가, 우리가 키스하려던 곳을 그리고 내가 널 꽉 끌어안았던 그 방을

나는 오늘 밤 걸어 지나가야만 하네.     

그리고 내가 널 꽉 끌어안았던 그 방을

나는 오늘 밤 걸어 지나가야만 하네.     


노래가 끝났을 때 그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 둘 다 좋아했던 샌드위치 가게에서 만나 테이크아웃해서 공원에 갔다. 다리를 건너다가 그가 다임을 건네며 소원을 빌라고 하기에 의문의 눈빛을 보내니 요정에게 톨비를 내는 거라고 했다. 그럼 무사히 다리를 건너게 해준 뒤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나의 소원이 뭐였는지는 희미하지만 그의 소원은 나의 행복이었다.


이마에 그의 키스를 받고 돌아가는 길, 머릿속엔 내내 케이크의 Walk on by가 재생되었다. 

그때 크게 따라 불렀던 부분이 있다.     


난 계속 이곳으로부터 걸어가려 해.

그리고 다른 편에 닿으면 널 잊을 거야.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오며, 긴 긴 시간의 강물을 따라 흐르며 그를 사랑했던 마음은 잊혔지만 그날의 멜랑콜리와 케이크의 음악만은 내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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