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愛, 로路, 소설小說
02 카미노 데 산티아고

_ 게으른 순례자의 하루

by Snoopyholic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 도시에서 가장 저렴한(그래서 경쟁이 치열한) 알베르게를 찾아 재빠르게 침대를 맡고 한숨 돌린 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너무나 오랜만에 맞닥뜨린 커다란 도시라서 나는 촌놈이 갓 서울 상경한 듯 어리둥절했다.

거리를 걸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이 마주친 사람에게 반갑게 웃으며 ‘올라, 부엔 카미노’(hola, buen camino 스페인어로 ‘안녕, (산티아고까지) 즐거운 걸음이 되기를’이라는 뜻의 순례자들 사이에서 상용되는 인사말)를 외칠 뻔했다.

그렇게 했다가는 이상한 사람 취급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란 얼마나 적응을 잘하는 동물이던가!

다행이 15분 정도 지나자 나는 다시 순례자에서 도시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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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돌아다니며 예쁜 가게들을 많이 발견했다.

만약 내가 관광객이었다면 신나게 모든 숍을 들락거리며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보거나 신발을 신어보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겠지.

예쁜 소품이 많은 가게에서는 물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순례자였다.

내 배낭에 쓸데없는 무게를 얹을 물건은 철저하게 쇼핑 대상에서 제외된다.

더군다나 딕이 내일 떠나야 하므로 다 같이 모여 거나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기에 별로 시간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경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며 여러 가게를 돌며 쇼윈도에 코를 박고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선 예쁘게 화장하고, 마네킹에 걸린 검은색 드레스를 입는 거야.

그리고 아까 지나온 액세서리 가게에서 봤던 것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금색 빈티지 목걸이를 하고, 검은색 하이힐 샌들을 신어야지.

선글라스를 끼고 멋지게 걸어 나와서 여기 광장 노천카페에 앉아 차나 와인을 마시며 두꺼운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쓴다면 몇 시간이라도 훌쩍 가버릴 테지.

오드리 헵번도 날 부러워했을걸.’


혼자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즐거워하는데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세라, 여기서 뭐해, 우리 약속시간에 늦었어. 얼른 가자.”


비눗방울 터지듯 오드리 헵번도 울고 갔을 예쁜 화장과 우아하던 검은 드레스, 목걸이, 하이힐이 뻥하고 사라져버렸다.

대신 평생 입을 횟수를 이 길 위에서 이미 다 입어버린 듯한 낡은 자주색 티셔츠와 하늘색 트레이닝 바지에 투박한 등산화를 신은 검게 그을린 맨얼굴의 내가 점심을 먹으러 딕과 발걸음을 재촉했다.

도착해보니 우리가 마지막이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환송회를 빙자한 맛있는 점심식사의 구성인원은 언젠가 알베르게에 함께 묵은 적이 있어 안면이 익은 어린 미국인 커플과 롭이 데려온 스페인 청년 후안, 딕, 롭, 나 이렇게 6명이었다.

레스토랑에 둘러 앉아 와인을 마시며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고 보면 참 신기하다.

모두들 서로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재잘재잘 참 많은 말들이 테이블 위로 오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랑에 빠진 어린 커플은 내년 봄에 결혼식을 준비 중인데 벌써부터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고, 딕은 6개월이나 놀다가 어떻게 학교에 돌아가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벌써부터 약한 모습을 보였다.

다들 서로의 말에 주위사람들과 자신의 경험 이야기를 조언으로 덧붙였다.

롭은 이 대화의 장을 이끄는 사회자 같았다.

한 가지 화제가 끝나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져 대화를 이끌어냈다.

이 그룹의 유일한 스페인사람인 후안은 혹시라도 대화 중에 스페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귀를 쫑긋 세우고 혹시 이 외국인들이 자신의 문화를 잘못 알고 있지는 않은지 신경 쓰며, 만약 그런 대목이 나오면 재빨리 잘못된 정보를 정정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여워 사람들은 일부러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투척하며 후안의 혼을 쏙 빼놓았다.

나는 이런 대화의 진행을 처음에는 경청했으나 곧 지루해져서 자꾸만 와인 잔을 돌리며 투명한 곡선 위로 흘러내리는 와인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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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하면서도 붉은 이 액체는 질투 날 정도로 아름다운 색을 가졌다.

스페인의 태양빛을 더 매혹적으로 투과시켜 내 손에 닿은 붉은 액체가 담긴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니 내가 걸어온 길에서 맡았던 냄새들이 다시 느껴졌다.

입 안으로 흘러들어간 액체는 이제 자신이 포도였다는 사실과 숙성되며 형성된 새로운 향기들을 내게 알려줬다.

내가 여태껏 걸어서 보아왔던 포도밭의 정기가 그대로 담긴 와인 한잔을 통해 입 안 가득 느껴질 수 있다니 참 신기했다.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는지 사람이 많아서 음식 나오는 시간이 꽤 지체됐다.

이런 때 뭐든 설명해주길 좋아하는 제이미였다면 내게 자신이 아는 모든 이야기를 동원해서 지루한 기다림도 즐거운 시간으로 만들어주었을 텐데.

옛 남자 따위 생각하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싶다가도 불쑥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베르토는 잘 지내나?

내가 그렇듯 그도 가끔은 내 생각이 날까?

모르겠다.

쓸데없이 남자들 생각하느라 우울해하지 말자고, 어서 음식이나 나왔으면 좋겠다고 혼자 중얼거리는데 정말 웨이터들이 음식을 서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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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음식으로 카스테이야(Castella) 지방의 특산 수프와 빵이 나왔다.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다는 후안의 말에 혹해서 선택했는데, 몇 숟갈 떠먹고 나니 슬프게도 잘못된 선택이었음이 밝혀졌다.

도대체 수프에 무얼 넣었는지 나에겐 너무 역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와 같은 길을 택한 사람들 모두 수프의 대부분을 남기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두 번째 음식은 종류를 알 수 없는 생선요리였는데 영국에서 먹던 피쉬 앤 칩스마냥 튀겨서 나와서 좀 실망했으나 내 취향대로 기름기는 최소화하여 담백하고 생선살의 신선도가 살아 있어 용서하기로 하고 맛있게 먹었다. 위에 얹어졌던 백아스파라거스도 적당히 삶아졌고 파슬리가루와 함께 뿌려진 화이트소스 역시 느끼하지 않고 깔끔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선택했던 음식은 플란.

계란과 바닐라, 우유, 크림을 주재료로 만들어 흑설탕을 녹인 소스로 마무리하는 일종의 푸딩인데 레스토랑마다 만드는 비법이 달라서 내가 즐겨 찾는 ‘뽀스뜨레’였다.

이곳의 플란은 다른 곳에 비해서 바닐라의 향이 강하면서 입자가 고와서 입속에 들어갔을 때 혓바닥 위로 달콤하고 부드럽게 녹아들어 감미롭기까지 했다.

탁월한 선택!

이로써 수프에서 느낀 약간 억울했던 감정은 충분히 보상됐다.


다들 배부르다는 소리를 연발하며 터져 나갈듯한 위장을 붙잡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와 보니 아직 햇살이 눈부셨다.

모두 걷는 건 지쳤다며 벤치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 저마다의 오후를 즐기는데 나는 도시를 좀 더 둘러보고 싶어서 혼자가 되어 돌아다녔다.

우선 광장을 떠나 오래되어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 봤다.

아까는 눈치재지 못했는데 관광도시이기도 한지 목에 카메라를 걸고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저마다 마음에 드는 배경을 두고 한껏 포즈를 잡으면 함께 다니는 사람은 멋지다는 소리를 연발하며 셔터를 눌렀다.

내 사진이 별로 없다는 것은 혼자 다니면 조금 쓸쓸한 점 중에 하나였다.

뭐 어떤가, 적어도 내가 본 것들은 남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기록에 열중해왔던 나다.

그렇게까지 꼭 사진이 필요하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실제로 이 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카메라가 주는 무게도 덜어버리고 오직 머리와 마음에 이 모든 풍경과 사람들을 담아내는 것이 오히려 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생각했지만 내가 지나친 잊지 못할 풍경들과 특별한 시간 속에서 만나 추억을 만든 사람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기엔 내 두뇌의 능력이 모자람을 알기에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순례자들 중에서 괜히 사진기를 두고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음을 기억한다.

만약 내가 카메라를 두고 왔다면 매일 카메라의 부재에 대해 슬퍼하다가 끝내 어딘가에서 새 카메라를 사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카메라와 관련 부속품의 무게는 내게 필수불가결한 인생의 짐인 셈.

도시를 메운 건물들 위로 웅장한 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얼핏 바르셀로나의 대성당보다 클 것 같았다.

호기심에 발걸음도 빨라졌다. 곧 골목의 끝에서 대성당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드러났다. 햇살에 반사되어 더 우아하게 빛나는 고딕양식의 성당이 잠시 나의 숨을 멎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배경에는 아까 아침에 흐렸던 건 농담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은, 티끌 하나 보이지 않고 파란 하늘이 펼쳐져있었다.

들어가 볼까 했는데 입구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시간도 많지 않아서 근처 어디에 자리를 잡고 바깥을 실컷 감상한 뒤 다음 날 들어가 보기로 했다.

엷은 주황색을 띄던 햇살이 점점 짙은 주황색으로 건물을 물들이더니 성당으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그림자가 건물을 삼키고 하늘까지 뻗으면 밤이 되겠지.

대성당 주변을 천천히 돌며 내일 아침 일찍 나오면 막 새로 뜬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은 어느 부분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지 상상해봤다.

있다가 알베르게로 돌아가면 가이드북을 읽으며 이 성당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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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한 노천술집에서 아까 점심을 함께했던 일행에 다른 순례자들까지 섞여 벌이는 와인과 맥주 파티에 맞닥뜨렸다.


“세라, 어디가?”

“응? 알베르게로 돌아가려고.”

“에이, 아직 이른데? 여기 와서 한잔 해. 모두 모였어. 딕의 마지막 밤이기도 하잖아.”

“그럴까? 그럼 나도 맥주나 한 잔 마시고 가야겠다.”


같은 시기에 특별한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이 모여 이 길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두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고, 누군가로부터 들었을법한 이야기일 텐데도 그 누구 하나 지루하다는 표정 없이 그저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순례자의 즐거운 음주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알베르게의 귀가시간이다.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것 마냥 호탕하게 웃어대던 사람들이 ‘귀가시간’이라는 단어에 놀라 황급히 술값을 계산하고 알베르게로 달려갔다.

대개의 알베르게는 귀가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이 되면 대문을 걸어 잠갔다.

규율이 엄격한 곳은 저녁9시가 되면 정확하게 문을 닫고, 10시에는 건물 전체를 소등한다.

순례자는 그 사이에 취침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아침7~8시 까지는 모두 퇴실해서 순례자로서의 새로운 날을 개시해야 한다.

물론 규율을 지키는 엄격함의 강도가 각각 다르긴 하다.

어쨌든 입실할 때부터 시간엄수라는 말을 꽤 강조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다들 열심히 뛰는 한편으로 다 큰 어른이 되어서 귀가시간이 웬 말이냐고 투덜댔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런 알베르게의 규율이야말로 우리를 호텔에 머무는 관광객과 구분해주는 가장 확실한 경계이므로 지켜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었다.

한동안 말도 못 할 정도로 열심히 뛴 덕에 모두 늦지 않고 침대와 배낭 곁으로 돌아왔다.

양치질만 급하게 마치고 침낭으로 파고들어 하루를 회상해봤다.

시작은 순례자였다.

아침부터 힘든 오르막길이 몇 차례나 있었다.

그런데 버스 승차부터 윈도쇼핑, 거나한 점심, 한밤의 음주까지 완벽하게 느슨한 관광객으로 보냈다.

하지만 결국 밤에는 알베르게 통금시간에 맞춰 뛰어야 했다.

어쨌든 시작과 마감은 순례자로서 하는걸 보니 우습기도 했다.

잊어버리기 싫어 살짝 손전등을 켜고 일기장에 ‘오르막과 내리막, 버스, 대도시, 오드리 헵번, 점심, 맥주 한잔, 귀가시간-게으른 순례자의 하루’라고 기록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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