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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opyholic Aug 10. 2016

서태지와 아이들_ 난 알아요

Amami Oshima奄美大島

덥다. 너무 덥다. 끔찍하게 덥다. 도대체 이 더위의 끝은 어디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것이니......     


나는 원래 여름을 힘들어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다. 더우면 그냥 덥구나, 여름이니 당연한 일이지, 땀을 흘리면 몸이 식겠지, 어디 그늘로 들어가 한 줌 바람 맞으면 될 일이지, 선풍기만 있다면 나쁘지 않아, 따위의 말들로 덥다며 퍼덕이는 주위 사람들을 더 덥게 만들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 여름, 그때 그들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한 벌을 한꺼번에 아주 달게 받는 중이다.

그 증상들은 이러하다.     


1. 잠을 못 잔다.

이게 가장 힘든 형벌(?)이다. 새벽에 거의 한 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서 혼자 조용히 “덥다”고 중얼거린 뒤 다시 누워 잠을 청하게 됐다. 그래도 참고 참고 또 참아봤지만 온종일 몽롱하고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고가의 설치비가 부담스러워 내년에 이사 갈 것을 생각해서 달지 않고 버티던 에어컨을 결국 달았다.

아, 이제 푹 잘 수 있겠지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 중의 오산이었다.

에어컨이 꺼지는 즉시 좀비 깨어나듯 일어나 다시 “더워, 아 정말 덥네”를 중얼거리며 냉장고 앞을 서성이다 냉수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잠을 청하는 나날이 반복 중이다.     


2. 아침의 햇살이 무섭다.

본디 아침 햇살이란 밤새도록 나를 깊은 잠에 빠뜨린 어둠이 물러가면 반짝이고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였다. 그런데 요즘은 잠을 설친 끝에 찾아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따가움에 더 가깝다.

마치 드라큘라가 햇빛을 무서워하듯......

딱히 외출을 감행하지 않고 그런다고 해도 몇 겹의 선크림으로 중무장을 하는데도 피부가 자꾸만 어두워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물론, 가위 눌린 사람마냥 온몸이 땀에 젖어(머리카락까지 젖는다) 일어나는 것은 예삿일.     


3. 급성 ‘떡실신’이 잦아졌다.

아마도 위의 두 가지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갑자기 필름이 끊기듯 수면상태가 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릴 정거장을 놓치는 수준은 아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잠시 쉬었다 세수랑 양치질이라도 한다고 생각하고 정신 차려보면 이미 새벽 서너 시인 일이 최근에 꽤 잦았다.

왜 이렇게 피곤한지......     


4. 내가 바닥인가, 바닥이 나인가.

집에서 일해야만 하는 특성을 가진 나로서 일하다가 지치면 찾아가는 곳은 바닥이다. 마루가 타일 재질이라 그나마 시원하다. 대나무 돗자리 위로, 그야말로 大자로 뻗는 것이 나의 휴식이다. 그렇게 누워 있다 보면 점차 내 피부가 최대한의 면적으로 차가운 바닥에 닿기를 열망하게 되고, 그런 상상에 골몰하다 보면 바닥과 내가 물아합일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했다가 급성 떡실신으로 최장 한 시간은 정신을 못 차리는 건 각오해야 한다.     


몇몇 지인들은 1994년의 여름을 떠올리며 올해의 더위에 치를 떨었지만 나로서는 1992년의 여름을 자꾸만 떠올리게 됐다. 물론 내 인생에 가장 더웠던 여름은 아랍에서 보낸 2010년이었지만 사실 그건 아예 상상을 초월하는 다른 단계(섭씨 45가 넘음)이니 말을 말자.     


1992년의 여름을 나는 일본의 아마미오오시마에서 보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꽤 낯선 곳인데 위치로 보자면 오키나와와 규슈의 중간지점이라고 보면 되겠다.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심지어 한 번은 혼자서) 갔어야 했던 것이 기억난다. 중학교 1학년이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어른이 다됐다고 착각 하는 나이가 아니던가! 하지만 언어도 거의 하지 못하던 그곳에서 얼마나 무기력했던지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날씨는 왜 그렇게 덥던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더위였다. 그때였다. 땀 흘리며 일어나는 더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일본어는 낯설었고 나는 자주 뭘 해야 할지 모르거나 저들이 자기들끼리 주고받다가 웃을 때마다 대체 왜 웃는 것인지 알기 위해서 모든 힘을 끌어 모으곤 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의 천성은 쉽게 꺾을 수 없는 법. 넉살 좋은 나는 금세 낯선 분위기에 적응했다. 그곳의 모든 사람들도 나에게 친절했다. 나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고, 나에게 말을 걸었고 자신의 집으로 기꺼이 나를 초대해줬다. 그런 따뜻한 보살핌 덕분이었는지 몰라도 나는 일본어로 웬만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어디 그뿐일까......

말로만 들어봤던 혹은 스크린 위에서만 봤던 거대한 여객선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것도, 그 어떠한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순수한 푸른 바다를 본 것도, 몸에 튜브를 끼고 물안경만 쓰고 들어가면 펼쳐지던 산호와 열대어들의 장관도, 집에서 갓 구운 빵의 신성함을 알게 된 것도, 세상에는 패션푸르트라는 시고 달고 심지어 짠 것도 같은 오묘한 색깔의 과일이 있다는 것도,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구렁이를 본 것도, 옆집 강아지를 자전거 앞 바구니에 싣고 석양 속을 달리며 행복감을 느꼈던 것도, 비록 3도였지만 지진을 겪어본 것도, 태풍이란 이 세상을 쑥대밭으로 휘저어놓고 갈 수 있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다 이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매일 밤,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을 들었다.



자주 가슴 벅차는 경험과 경이로운 장면에 감탄을 멈출 수 없던 나날이었지만 집에서 너무 멀리 떠나왔다는 기분에 밤이 찾아오면 쉽게 멜랑콜리에 젖어드는 감수성 예민한 소녀가 스스로에게 내린 처방이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방에서 막 샤워를 마친 뽀송한 몸으로 폭신한 침대로 들어가 누우면 이어폰을 꽂고 카세트 플레이어에 작은 세모가 새겨진 버튼을 눌렀다.

그럼 조금 있다가 서태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거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아무리 피곤한 날도 나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현석이 오빠’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절대 잠들지 않았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면 그대 떠나는 모습을 뒤로 하고 

마지막 키스에 슬픈 마음 정말 떠나는가     


저 대목이 지나가면 긴장이 풀리면서 나른해지기 시작하다가 금세 잠들곤 했다. 하지만 흥분이 가시지 않은 날에는 잠드는 시간이 유예되곤 했는데, 그 과정은 대개 이러했다.

‘환상 속의 그대’가 나올 즈음엔 이제 내가 정말 환상 속에 있는지 현실 속에 있는지 가물가물해지고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를 들으면서는 이 까만 밤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가는 나를 느끼고 ‘이 밤이 깊어가지만’을 들으면서 마침내 꿈나라 속으로 진입했다. 그러면 또 스리슬쩍 테이프의 A면이 끝나면서 자연스럽게 딥슬립.

B면은 언제나 내킬 때 일기를 쓰면서 들었더랬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도 숙면 따위는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났다. 

매일 아침 7시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내 몸을 적신 땀을 느끼며 일어났던 기억. 

비몽사몽 거실로 가는 길, 식탁에는 일본 엄마가 막 구워낸 따뜻하고 폭신거리는 빵과 싱싱하다고 소리라도 지르는 것 같은 과일들, 그런 과일들로 직접 만든 잼들, 먹기 좋은 상태로 적당히 말랑해진 버터, 따르자마자 컵에 이슬이 생기는 차가운 우유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럼 나는 내 자리에 앉아 힘차게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를 건넨 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듣는 밤이 찾아오기 전까지 과연 어떤 하루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거였다.

올림픽이 여섯 번째로 더 열리고 있는 지금이긴 하지만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도 이 노래를, 이 노래가 수록된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을 다시 밤마다 듣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몸의 어딘가 이때의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면 아직 어둠이 밤을 지배하는 동안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덥다고 중얼거리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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