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愛, 로路, 소설小說
02 카미노 데 산티아고

_ 카미노데산티아고에서 얻은 지혜, 사랑이란 와인 같은 것

by Snoopy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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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됐는지 누군가 나를 흔들었다.

눈을 번쩍 뜨니 아직 컴컴한데 켜진 눈부신 손전등 불빛 사이로 롭이 보였다.

오늘은 많이 걸을 예정이라 먼저 떠난다는 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회색빛으로 찌푸린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방 안을 차지하고 있었고 잠꾸러기 순례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라서 급히 배낭을 싸는데 어디선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무시하려했는데 자꾸만 들려와서 조금은 무서워졌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귀신이 곡을 하는 것이거나 내 머릿속에서 환청이 울려 퍼지는 것.

혹시 곡하는 귀신이라도 발견하게 될까 해서 방을 세심히 둘러봤더니 나 말고도 다른 한 사람을 발견했다.

배낭과 신발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아 조심스럽게 침대 뒤쪽을 살펴보니 짧은 금발에 파란색 눈을 가진 예쁜 내 또래의 여자가 울고 있었다.


“저기 방해할 생각은 없는데, 이 알베르게 곧 문 닫을 시간인데 괜찮겠어?”

“그래? 알았어. 짐을 쌀게. 미안해.”

“미안하긴, 괜찮다면 오늘 같이 걸을래? 방해받기 싫으면 혼자 걸어도 되고.”

“아냐, 같이 걷자.”

“이름이 뭐야? 난 세라라고 해. 반가워.”

“난 사라야. 만나서 반가워.”

“사라? 내 이름이랑 비슷해서 잊어버릴 리는 없겠다.”

“그러게. 어쨌든 조금만 기다려줘. 배낭 금방 쌀게.”

“알았어, 난 문 앞에서 기다릴게.”


잠깐 울음을 그치는 듯했던 그녀였으나 짐을 싸면서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다시 눈물을 흘리나보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저렇게 서럽게 우는 걸까?

부은 눈을 한 채 배낭을 메고 내 앞에 나타난 그녀는 매우 초췌해 보였다.

그 모습이 잔뜩 흐린 날씨와 완벽한 한 쌍을 이뤘다.

함께 걷기를 시작하긴 했지만 우리는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녀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혹시 꽤 강력한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지피는 꼴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까는 초면부터 울어서 미안했어.”


아, 드디어 사연을 말하려고 하는군.


“무슨 소리! 괜찮아. 그런 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무슨 일인지 잘 모르지만, 그냥 나쁜 일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2주를 함께 걸었던 사람이 있어. 이틀 전에 혼자 걷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오늘 아침에 문자를 보내왔더라고. 자기는 이제 더 이상 이 길을 걷지 않을 거라고. 갑자기 더 이상 그 사람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두렵고 서러웠어. 나 그 사람을 많이 좋아했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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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스위스의 작고 조용한 마을 도서관의 사서였다.

책을 읽는 것을 제외하고는 매일이 지루하고 평범했다.

그녀를 마음에 들지 않는 쳇바퀴의 일상으로부터 구해줄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는데 때마침 산티아고 가는 길에 대한 책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단다.

당장 사서 일을 그만두고 스페인 행을 결정했다.

그러나 처음 며칠, 평소에 등산이나 야외활동이 거의 없었던 그녀였기에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든 산티아고로의 여정은 그녀에게 너무 벅차고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배낭은 그녀가 짊어지고 걷기에 너무 무거웠고 피레네 산맥은 험하고 가파르게만 느껴졌을 뿐이다.

점차 그간 외면해왔던 스위스로, 작은 마을의 사서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속의 외침이 점점 크게 들려오던 와중에 그녀 앞으로 매력적인 브라질남자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에게 반했고, 즉시 둘만의 로맨틱한 순례길에 올랐다.

사람이 많은 알베르게보다는 둘이 호젓하게 지낼 수 있는 캠핑을 선호했고, 한시도 서로의 몸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비록 작은 마을의 크지 않은 성당이었지만 경건함과 성스러움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칙조차 잊은 채 그들은 타오르는 사랑만이 연인에게 허락하는 짜릿한 쾌락을 만끽했다.

그와 함께하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탈의 빈도수가 잦아졌다.

사라는 자신은 결코 해낼 수 없을 거라고 믿어왔던 행위들을 그와 함께라면 쉽게 해냄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했다.

배낭의 무게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단다.

그러나 절정에 다를 때마다 영원으로 이어지길 바랐던 빛나는 시간은 2주가 지나자 마지막 폭죽이 터진 불꽃놀이처럼 변하고 말았다.

사라는 다시 멋진 폭죽이 터져 하늘을 수놓을 것이라며 기다렸지만 그런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돌변한 그의 태도에 직면해야 했다.

브라질 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사라에게 당분간 떨어져서 걷자고 제안해왔다.

그녀는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둘의 관계가 숨 막히게 극적으로 흘러왔기에 다만 그에게 되새김질할 시간이 필요한가보다 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사흘간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걸어왔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그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더 이상 너에게 상처를 줄 수 없기에 난 이제 이 길에서 떠날 거야. 비록 나는 곁에 없지만 넌 원래 생각대로 끝까지 이 길을 걷길 바라. 안녕.’


회한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이야기를 읊조리다가도 몇 번이고 격해진 감정에 눈물을 글썽이는 사라를 보니 아직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음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어서 나도 제이미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따지고 보면 결국 우리 둘 다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신세가 아니던가!

벌써 동병상련의 유대감으로 우리 둘 사이가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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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 남자 너무했다.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3년을 끝낼 수가 있어? 넌 그로 인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많은 세월을 허비해야 했는데. 너야 그러든지 말든지 자기는 너와 우정을 유지하고 싶으니 연락하자고 하자니. 너무 이기적이야.”

“그러게. 네 브라질남자도 마찬가지지 뭐. 순수하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 너와의 시간을 정리하고 떠나버린 거잖아.”

“그래도 두 남자는 이 모든 건 내가 너무 모자란 놈이라, 너를 사랑해서, 너에게 상처주기 싫어서라고 말들을 하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은데. 이제 나는 익숙한 너 말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이야.”

“맞아. 그럼 나는 괜찮으니 돌아오라고 애걸하거나 내가 변하면 돌아올 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희망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되잖아.”

“어쩌면 남자들이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그건지도 몰라. 자신이 관계를 맺었던 여자로부터 잊히는 것. 대신 그녀가 자기를 언제나 기억되고 추억해주길 원하는 거지.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그렇게 위장하는 거야. 그녀로부터 ‘천하의 나쁜놈’으로 잊히는 것보다는 ‘내게 그리움을 남기고 떠난 그’로 남고 싶으니까.”

“오, 세라 어쩜 틀리는 말이 하나도 없니? 정확한 지적이야.”

“그걸 깨닫기까지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지.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은 여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있어. 여자들도 나를 버리고 떠난 남자가 ‘나쁜놈’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거든.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은 여자이기보다는 서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제약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비련의 주인공이길 바라지. 그래서 많은 경우 이 거래가 성립하는 거야. 자신이 오래도록 기억되길 원하는 남자, 버림받고 싶지 않은 여자.”

“맞아. 그 문제도 있지. 세라, 너와 함께 이 길을 걷게 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나 혼자였다면 아마 지금도 계속 그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들여다보며 울고 있었을 거야.”

“혹시 그가 돌아왔으면 좋겠어?”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

“방법이 하나 있긴 해.”

“뭔데?”

“이제부터 그 남자한테 연락하지 마. 할 수 있겠어?”

“......”

“네가 먼저 연락을 끊으면, 만약 그에게 조금이라도 사라를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다면 분명 다시 연락이 올 거야. 하지만 연락이 안 올 경우엔 정말 끝난 거라고 보면 되지.”

“알았어. 노력해볼게.”


우리는 작고 오래된 성당이 많은 좁은 골목을 지나며, 오랜만에 나타난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남녀가 데이트 할 때 비용은 누가 내는가의 단순한 주제부터 사랑과 섹스의 상관관계, 결혼이라는 제도는 올가미인가 울타리인가에 이르는 심도 높은 주제까지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닥치는 대로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면 역시 사람은 혼자만은 살 수 없는 존재다.

내가 그녀에게 임시방편으로 처방한 약발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사라의 얼굴에서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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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두 여자의 만남을 반기는지 아침까지 잔뜩 흐리고 비까지 뿌리던 하늘이 몇 개의 하얀 구름만을 남겨둔 채 파랗게 개어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게다가 긴 구간 볼 수 없었던 물도 다시 나타나주었다.

오랜만에 물과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색을 한꺼번에 보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점심은 둘이서 있는 재료를 다 모아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보통 바게트 사이에 햄과 치즈, 있으면 토마토까지 껴서 먹는 것이 다였는데 사라에게 있는 올리브오일을 좀 바르고 마늘까지 얇게 썰어서 넣어 먹으니 훨씬 그럴듯한 맛이 났다.

오후 4시 경에 특이한 모양의 성당 옆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해서 널고는 모여앉아 와인을 마시는 순례자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다들 딱히 말을 나눠본 적은 없지만 서로 안면이 있던 사람들이 나와 사라를 반갑게 맞아줬다.

그중에는 내가 두 번째 날 만났던 브라질 출신의 아가씨 루비도 있다.

그때의 그녀는 다리에 문제가 생겨서 이 길을 포기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있었는데 지금은 다 나아 무사히 여정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옆에는 이 길에서 만났다는 잘생긴 독일 청년 알렉스가 듬직하게 서있었다.

둘은 손을 꼭 잡은 채 모두와 대화를 하다가도 서로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다가 까르르 웃곤 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그들의 모습에서 싱그러운 연두색 빛이 감도는 듯했다.

와인으로 따지자면 보졸레누보 같이 막 나온 새 와인이었다.

옆에는 나 말고도 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함께한 지가 10년도 넘었다는 독일인 커플 이바와 요나스였다.

따로 결혼식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만은 여전하다고 했다.

그들에게 열정에 대해서 물었더니 웃으며 오랜 시간을 함께 해서 가장 좋은 점은 서로에게 쏟아야 하는 열정은 최소화되고 나머지 열정을 다른 일에 쏟아 부을 수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언제가 가슴 뛰는 열정으로 사랑을 해야 한다면 지금까지 이뤄온 업적을 착실하게 이룰 수 있는 에너지를 모두 사랑에 소모해버려서 여기까지 오기가 힘들었을 거라고.

헤어질 뻔했던 일은 없냐니까 이바가 정색을 하고 요나스를 귀엽게 흘겨보더니 왜 없었겠느냔다.

요나스는 그냥 허허 웃으며 와인만 마셨다.

이들에게서는 잘 보관된 채 오랜 세월을 견뎌낸 잘 익은 와인의 색깔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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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종일 유난히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하루였다.

사라나 나의 사랑 이야기를 비교해보면 내용이 똑같다.

만나고 반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사라는 그걸 2주간 하고 나는 3년간 했을 뿐.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 이야기도 저 모든 형식에 여러 가지 요소를 첨가해서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에이, 그들도 결국은 죽는다.

다만 누가 먼저 죽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랑에도 반드시 헤어짐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연인의 사랑은 세상에 많고 많은 와인과도 같다.

어떤 품종의 포도인지, 토질이나 물은 어떤지, 그 해의 날씨가 어땠는지가 출발이다.

여기에 농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을 담는지 후에 보관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와인은 천차만별의 맛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사랑이 두 사람의 노력에 따라 천차만별로 진행되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와인도 보관을 잘못하면 상해서 마실 수 없게 된다.

조금 어수룩한 와인도 디켄팅이라는 과정을 통해 공기와 결합시키면 훌륭한 맛을 내기도 한다.

빨리 마셔야 좋은 와인이 있고 오래 두고 마시는 와인이 있다.

와인마다 가장 맛있는 절정의 시기가 있는데 그 포인트를 넘긴다고 해서 와인을 마시지 못하는 건 아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빨리 끝나버리는 사랑, 오래 진행되는 사랑이 있다.

아무리 멋진 사랑도 관리가 소홀하면 관계가 변해서 끝나버리기 쉽다.

어수룩하게 시작됐던 사랑도 두 사람이 노력하면 환상적인 커플로 남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애틋한 감정이 최고로 고조되는 포인트가 지난다고해서 그 사랑이 끝나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와 제이미의 사랑은 3년 만에 변질된 와인인가보다.

아니다, 변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병을 비웠을 뿐이다.

그와 내가 빚어낸 와인은 우리가 너무 열심히 마셔버리는 바람에 3년 만에 바닥이 나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와인이 되었다.

우리가 빚어낸 그 액체는 제이미의 몸, 나의 몸속으로 흘러들어 혈관으로 퍼져나가 우리를 마비시키더니 지독한 숙취만을 남긴 채 소멸되고 말았다.

만약 누군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상관없다.

어쨌든 나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낸 훌륭한 와인을 다 마셔버리는 바람에 이제는 더 마시고 싶어도 찾을 수 없을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으므로.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