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愛, 로路, 소설小說 02
카미노 데 산티아고

_ 4km/h의 상념들

by Snoopy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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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뜨겁던 태양도 아직 잠들었는지 캄캄했다.

손전등을 켜고 부스럭거리며 배낭을 싸는 부지런한 순례자 그룹에 동참했다.

사실 조금 더 자도 됐지만 어차피 잠은 달아나버린 지 오래였다.

고맙게도 두툼한 침낭을 빌려준 예술가 오스피탈레로 케빈에게 덕분에 따뜻하게 푹 잘 수 있었다고 감사의 쪽지를 썼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대충 이를 닦고 돌아와 전날 빨아뒀던 양말과 수건을 만져봤더니 아직 축축했다.

다행이 오늘 입으려고 빤 옷은 잘 말랐다.

바짝 말라 냉기를 머금은 옷에서는 라벤더향 비누냄새가 났다.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배낭을 싸고, 제발 비가 내리지 않기를 바라며 옷핀으로 덜 마른 빨래들을 배낭에 고정시켰다.

이로서 걸을 준비 끝.

진한 파란색이던 하늘이 점차 붉어지는 것을 보니 해가 뜰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맑은 날이 이어질 것이라는 마음에 드는 신호이기도 했다.

길에는 투명한 다홍색 아침햇살이 드리워져 있었다.

적어도 비가 올 걱정은 없으니 안심하고 걸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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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운이 좋았던지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도시를 떠난 이후에 나는 내내 혼자서 걸었다.

물론 완벽하게 혼자였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반갑게 인사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었지만 모두 새로운 순례자들뿐이었고 걷는 동안에는 거의 혼자였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에서는 꽤 깊은 생각의 강이 오롯이 4km/h의 속도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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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너무 많은 시간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보내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한국의 부모님과의 관계랄지, 내가 과연 인생을 올바르게 이끌어나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 같은 고질적인 몇 몇 문제들이 여기에 불쑥, 저기에 불쑥 단단한 바위의 모습으로 튀어 올라 흐름을 방해하기도 했다.

거센 물살로 그 바위를 격파라도 하고 지나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생각의 물살은 그저 유유히 바위를 비켜 흐를 뿐이었다.

그나마 문제들의 본질이 단순하게 표면으로만 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물 밑에 얼마만한 크기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었으니 우선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심각한 주제들이 지겨워지면 혼자 얼토당토않은 인생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이를 테면....... 내가 만약 남자로 태어났다면 과연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을까?

분명 원양어선에 몸을 싣고 대양을 떠돌아다녔을 거야.

세계 곳곳의 항구에는 나를 기다리는 예쁜 애인들이 있었을 거고, 어쩌면 그 중에는 세월이 흘러 나도 몰랐던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는 여자가 생길지도 모르지.

왜 그 있잖아, 드라마나 영화에 보면 옛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아이를 키우고 있어 결혼해서 사나보다 했는데 우연히 아이의 등에서 내 등짝의 커다란 점의 위치와 생김새가 똑같은 점을 가진 걸 본다든지, 귀여워서 초콜릿을 사주려고 간 상점에서 탐스러운 복숭아를 보고 맛있어 보이니 저것도 사줄까? 하니까 아이가 식겁하며 저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어요, 라고 말한다든지(물론 냄새만 맡아도 두드러기가 솟아오르는 복숭아 알레르기는 집안의 내력이겠지) 하는 식으로 자식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대양에서 바다가재, 참치 같은 포획물과의 격렬한 전쟁이 일단락 지어지고 한바탕의 돈벌이가 끝나면 즉시 육지로 돌아가 애인들에게 선물을 사주고 그들과의 즐거운 유희로 달콤한 휴식을 취한 뒤,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정신없이 세상을 구경하러 길을 떠난다. 남태평양의 오지에 원주민 친구를 만들고, 아마존과 아시아 일대의 밀림을 탐험하고, 지역마다 특산품으로 나오는 각종 술을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보고, 문명이 그리워지면 유럽으로 들어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팔짱을 낀 채 들여다보는 거다.

돈과 정치, 문화를 지배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들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인간군상에 나는 속해있지 않음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겠지. 돈이 다 떨어질 즈음이면 다시 바다로 돌아가면 된다.

바다가 제 아무리 거칠게 나를 위협한다고 해도 저승사자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나는 살아남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설사 저승사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한들 어떠하랴, 물론 잠시 머뭇할 수는 있어도 비교적 당당히 그의 뒤를 따를 수 있으리라. 아니면 오히려 내가 저승사자를 설득시켜서 친구로 삼고 유예기간을 얻어내지 않을까?

아, 그런 근사한 삶이라니!

그리스인 조르바도 깜짝 놀랐을 삶일 것이다.

문제는 저렇게 살면 나 때문에 울게 될 여성이 몇 명이며, 지금까지 질서정연하게 잘 꾸려져왔던 천계의 질서가 나라는 말썽꾼 하나 때문에 흐트러지는 결과가 나온다는 점이다.

안될 일이다. 암, 안되고말고.

이런 연유로 나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나는 운명을 맞이한 것이라는 결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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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뜬구름 잡는 데 심취해서 본의 아니게 길을 잃고 40km나 걸어야 했던 날도 있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서 벗어난 것 같았는데 어디를 봐도 길을 안내하는 노란 화살표는 보이지 않았고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길도 보이지 않게 어두워져서 어디 들판 위나 길옆에서 외투를 뒤집어쓰고 자거나 운이 좋아 농가라도 발견하면 그곳의 문을 두드려 손짓 발짓 해가며 재워달라고 해야 할 위기에 처했을 때 허허벌판으로 친절한 노부부가 짠, 하고 나타나 나를 다시 산티아고를 향하는 길 위로 인도해 주었더랬다.

정말이지 이 길에는 나를 강력하게 보호하는 어떤 기운이 존재함이 분명했다.

특별히 내게 값진 보석이나 백마 탄 왕자를 내려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필요한 무언가가 생기면 순순히 그것들을 나에게로 보내주곤 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대화가 간절하면 사람을, 배가 고프면 음식을, 순례자라는 소속감이 필요하면 내게 도움을 주거나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질문에는 대답을.......

이른 아침에의 예상과는 달리 갑자기 하늘이 회색으로 뒤덮이더니 물방울이 하나, 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별것 아니겠거니, 무시하고 걸어가는데 구름으로부터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공기 중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내 얼굴에 맞는 횟수가 늘어나더니 급기야 우비를 꺼내 입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다.

많이 걸은 건 아니었지만 비를 맞으며 걷고 싶지 않았다.

길을 안내해주는 책을 펼쳐보았다.

여기서 2km 정도만 더 걸으면 알베르게가 있었다.

우선 거기까지는 그냥 열심히 걷기로 했다.

지도상에서 내가 비가 많이 오기로 유명한 갈리시아 지방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갈리시아는 비바람이 많은 곳이라 순례자들에게는 피레네 산맥 이후 난코스로 알려진 곳인데, 순례자들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품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니 순례자의 기억에 남을 마지막 풍경을 간직한 지역이기도 했다.

지역적 특성이 아니더라도 지난 며칠간 건조하고 맑은 날씨가 이어졌으니 비가 오는 것은 어쩌면 그저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섭리인지도 모르겠다.

어서 알베르게에 들어가 서서히 젖어드는 흙탕물기가 신발과 양말을 지나 발에 닿고, 발이 젖은 양말 안에서 퉁퉁 불어나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신발이 폭삭 젖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찍찍 소리가 나는 것은 물론 허술한 우비 덕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알베르게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뜻밖에 사라를 만났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