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벛꽃 그리고 도쿄 바나나
꼬꼬마로만 생각했던 사촌동생이 훌쩍 자라 친구들과 일본에 다녀왔다며 몇몇 기념품을 건넸다.
이건 되도록 빨리 먹으라고 덧붙이기에 받자마자 우선 하나를 꺼내어 바나나 모양의 빵, 도쿄 바나나를 베어 물었다.
‘맛있다!’
한 입 먹자마자 부드러운 빵 속에 달콤하고 진득한 바나나의 정수가 들어 있는 도쿄 바나나에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그때 사촌동생에게서 세 개를 받아왔는데 이 맛있는 걸 어떻게 해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 꽤 공들여서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도 이따금씩 도쿄 바나나를 먹을 일이 생기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맛도 맛이지만 먹을 때마다 나의 도쿄 추억도 함께 떠올라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해 봄, 일본으로 떠난 건 마일리지가 소멸될 예정이니 사용하라는 권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마일리지를 알뜰히 사용해 한 달은 도쿄에서 지내다가 두 주 정도는 나고야 근처에 사는 친구들을 방문하고 돌아온다는 계획을 세웠다.
도쿄 일정의 첫 미션은 밤 벚꽃 아래서 매실주 홀짝이기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그 미션을 그곳에 도착한 첫 번째 밤에 해치우고 말았다. 우에노 공원의 밤 벚꽃은 탐스럽다 못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벚꽃 아래는 만개의 순간을 즐기려는 수많은 인파로 북새통이었다. 내 기억 속 일본인은 대체로 조용하고 차분하고 긴장한 모습이었는데 벚꽃 앞에서의 그들의 모습은 굉장히 역동적이면서도 느슨했다.
그 모습을 보며 사람은 다 비슷하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더랬다.
이후로도 나의 도쿄 벚꽃 순례는 계속됐는데 신주쿠 공원, 이노카시라 공원 등지에서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끽했고 나처럼 꽃구경을 나와 봄을 즐기는 사람들과 만나 즐거운 일도 많았다.
한편으로는 절정이 지나고 찾아간 자리에서 바람에 날려 우수수 떨어지는 꽃비를 맞으며 인생의 덧없음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 뒤로는 철쭉으로 유명한 신사를 기웃거리거나 새벽같이 일어나 첫차를 타고 츠키지 시장에 찾아가 참치 경매를 구경하기도 했다. 오차노미야나 간다의 뒷골목을 쏘다니다 심심해지면 온갖 잡화가 모여 있는 도큐한즈를 둘러보곤 했는데 그러다가 가죽공예에 꽂히고 말았다. 그 뒤로는 아침에 눈 뜨면 골목길로 나가 가죽에 구멍을 뚫어 와서 가죽공예에 골몰하다가 저녁이면 친구가 알려준 단골 카페에서 글을 쓰며 당근케이크에 곁들인 홍차를 홀짝이다가 돌아오곤 했다.
또 다른 날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함께 그곳을 쏘다녔던 친구와 도쿄의 맛있는 레스토랑을 순례하고 록본기 힐즈에 올라 야경을 접수했다. 당시만 해도 연구원이었지만 지금은 교수님이 된 사촌동생(고모가 많은 만큼 사촌들의 나이도 다양하다)과 긴 수다를 떠느라 밝혔던 밤들도 많았다.
어느 공원에서인가 사진을 찍다가 사귀게 된 친구가 보여준 영화 <도쿄 타워> 때문에 괜히 혼자서 전망대 꼭대기까지 올라가본 오후도 있었다. 글 쓴다는 이유로 만나 인연을 잇게 된, 지금은 일본에 정착해 알콩달콩 살아가는 친구와 먹었던 교자의 바삭했던 식감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나고야에서도 서울에서도 한 달이나 도쿄에서 지내며 무얼 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도쿄의 공원과 거리에서 천천히 걸었다고, 콤비니(편의점)에서 에비수 캔맥주를 사다 안주를 곁들여 마셨다고, 벤스 카페에서 제일 커다란 당근 케이크를 골라잡아 먹으며 글을 썼다고, 지금 메고 있는 가방을 만들었노라고 대답했다. 그럼 그들은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오다이바는? 디즈니랜드는? 디즈니시는? 요코하마는?”
“다음에 가려고.”
그때 말했던 ‘다음’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도쿄 바나나를 먹을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그 시절의 도쿄로 돌아간다.
그 사이 몇 차례나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아쉽게도 도쿄가 아니어서 도쿄 바나나를 사오지 못했다.
지금은 일본의 웬만한 공항이나 기차역마다 도쿄 바나나를 팔고 있지만 도쿄에서 사야 진짜 도쿄 바나나라는 나만의 철칙 때문이다. 그러니 도쿄 바나나는 그곳에서의 추억과 함께 내가 도쿄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어떤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 참 좋은 일이다.
다음 번 도쿄 여행에서는 요코하마와 오다이바를 해치울 생각이다. 함께할 누군가가 있다면 디즈니랜드와 디즈니시에도 도전할 것이다.
아참, 도쿄 바나나는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우유를 곁들이면 조금 더 맛있다. 물론 차를 좋아하는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궁합은 밀크티와 함께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