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愛, 로路, 소설小說
02 카미노 데 산티아고

_ 재회 그리고 쉼표

by Snoopyholic

“사라!”

“세라! 그동안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난 네가 그 남자한테 간 줄 알고......”

“이야기가 좀 길어.”

“그나저나 어쩌다가 여기서 도장을 찍어주게 된 거야?”

“응. 그렇게 됐어. 여기서 지낸지 한 사흘 됐나?”

“그래? 오스피딸레라가 된 거야?”

“이곳은 사설 알베르게야. 사이좋은 부부가 운영하는데, 청소하고 순례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하면 며칠이고 묵어갈 수 있어. 그래서 나도 여기서 쉬어가게 된 거야.”

“그렇단 말이지. 사라가 여기 좀 더 있을 생각이라면 나도 며칠 있다가 갈까?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도 않고 며칠 혼자만 걸었더니 누군가 그립기도 했는데 너와 함께라면 좀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래. 지금 주인 부부가 장을 보러 나갔으니까, 있다 돌아오면 같이 말해보자.”

우리의 대화를 한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덥수룩한 수염 속에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을 숨기고 있는 아담한 남자가 다가왔다.

“사라, 누구야?”

“응, 엘리야, 세라야. 세라, 인사해, 엘리야야. 엘리야는 이곳에 있은 지 꽤 됐어.”

“만나서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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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이 잠자는 곳에 가방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폭삭 젖어버린 신발에는 신문지를 구해다가 구겨 빡빡하게 채워놓고 난 뒤에야 내려와 수염에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가진 엘리야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엘리야는 미국에서 온 음악 청년으로, 믿거나 말거나 바이올린으로 미국 최고 음대 줄리어드의 합격 통지서를 받은 순간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길 위로 자신을 내던졌다고 했다.

더 이상 음악이 자신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돈이 있을 때는 호텔에서 안락하게 잠들기도 하지만 돈이 없을 때는 히치하이킹과 노숙까지 감행하며 지금 이곳에 이르렀다고 했다.

엘리야의 경우 이곳에서 일을 해주는 대신 일정의 급료를 받기 때문에 이곳에 눌러앉게 됐는데, 큰돈은 아니지만 딱히 돈 쓸 곳이 많은 것도 아니므로 앞으로 돈을 좀 모으게 되면 산티아고까지의 여정을 마치고 유럽 쪽을 방랑하며 음악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기다릴 거라고 했다.

그땐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바이올린을 켜겠다고.

이제 20대 초반일 뿐인데, 이 젊은 음악가의 앞날에 이번 여행이 얼마나 값진 밑거름이 될 것인가를, 내가 로망으로 간직하고 있는 인생을 실제로 살고 있는 누군가가 존재함을 생각하니 살짝 질투가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그가 이번 여행을 통해 배운 인생의 철학에 대해 읊어대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대신 빛나는 엘리야의 눈으로부터 천천히 옮겨간 부엌의 창문 너머로 롭의 모습이 보였다.

밖에 앉아 쉬어가는 순례자들의 무리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평소의 나였다면 지체함 없이 달려 나가 반갑게 인사를 했을 텐데 창살과 빗물로 흐릿해진 유리를 사이에 두고 바라본 롭의 모습은 그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상당히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나보다 훨씬 앞서갔을 것이란 믿음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여태까진 내가 잘못된 믿음을 가졌지만 이제 그가 계속 길을 걷기 시작한다면 내 믿음은 다시 옳은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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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알베르게에 머무르고 가겠다는 순례자의 수가 늘어나고 엘리야는 슬슬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계획했던 것보다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며 당근이며 파를 좀 더 가져오겠다고 뒤쪽의 텃밭으로 나갔다.


“사라, 이제 어떻게 된 건지 말 좀 해봐. 이바와 요나스는 네가 남자의 문자를 받고 사라졌다고 하던데.”

“그래 세라. 브라질남자한테 연락이 왔어. 나는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즉시 그가 있다는 곳으로 버스를 타고 달려갔지. 하지만 그는 날 기다려주지 않았어. 난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라고. 결국 찢어지는 마음만 안고 다시 이 길로 돌아왔지. 그리고 우연히 이곳에서 이 주 정도 머무르며 일하던 여자애를 알게 됐고 나도 여기에 머무르기로 한 거지.”

“왜 그랬어, 내가 남자가 움직여 네게 오지 않는 한은 절대 찾아가서 만나면 안 된다고 했잖아! 하긴, 지금 그런 말이 네게 무슨 소용이 있겠니. 그 여자앤?”

“응 그 앤 내가 오자마자 떠났어. 너도 알잖아. 정해진 것 없이 흘러 다니는 카미노의 여정을.”

“그래, 그렇지. 그나저나, 마음은 좀 괜찮니?”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그냥 견딜 만해. 사실......”


사라는 갑자기 주위를 살피더니 내게 속삭였다.


“나 엘리야랑 좀 특별한 관계야.”

“뭐?”

“쉿, 아직 섹스를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로맨틱한 관계로 발전해가는 것 같아.”


활기차게 양동이 가득 신선한 야채를 들고온 엘리야 때문에 우리의 대화는 곧 중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신없이 스물 세 명분의 저녁을 준비하느라 어떻게 이후 세 시간이 흘러갔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다만 알베르게 주인 부부가 돌아와 여기에 조금 오래 머무르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의사를 비치자 흐뭇하게 웃으며 그러라고 했고, 부엌이 매우 복작복작했고, 그 와중에서도 엘리야는 기타 연주로 우리의 흥을 돋았고 이웃집 아저씨는 북으로 장단을 맞추고는 했다는 것 정도가 기억에 남을 뿐이다.

도무지 이런 난장판 가운데 요리가 탄생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우리는 훌륭히 스물 세 이 먹을 음식을, 그것도 세 코스로 훌륭하게 만들어냈다.

첫 번째 코스는 각종 야채와 고기 덩어리가 들어간 스프, 두 번째 코스는 삶은 야채와 카레향이 풍기는 조밥, 마지막 디저트는 달콤한 초콜릿 브라우니였다. 음식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순례자들이 들고 온 와인들을 모두 모아 잔을 채운 뒤 건배했다.

식사 후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될 만큼 많은 접시와 식기들이 쌓였지만 꽤 여러 명이 달라붙어 움직인 덕에 설거지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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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끝난 뒤에는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일부 순례자들은 빗속을 뚫고 알코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술집을 찾아 나섰고, 부엌에서 요리부터 함께 고생했던 엘리야, 이웃집 아저씨, 사라, 내가 모인 테이블을 중심으로 다른 순례자들이 모여들어 길이 왜 자신을 부른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이야기들을 했다.

모두들 그렇게 진지하게 인생에 고민을 하고 그에 따른 답을 구하기 위해 이 길을, 각자의 가방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거였다.

어렴풋이나마 대답을 알 것 같다는 사람도 있었고 전혀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굳이 대답을 구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문득 사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되풀이 하게 됨으로써 일종의 대답을 구하게 되고, 또 결국은 같은 인간일 뿐인 다른 사람의 여러 가지 레퍼토리를 들으며 그 속에서 자신이 찾아 헤매는 대답을 찾게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이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 해주려고 눈을 들어 사라를 찾아 두리번거렸더니, 저쪽 어두운 구석에서 엘리야와 진하게 키스하고 있었다.

어둠 속이지만 사라가 행복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항상 브라질남자 때문에 속 끓이며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는데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 힘든 시기에는 반드시 적절한 위치에 쉼표가 필요하지.

그래야 숨도 쉬지. 그게 반드시 힘든 시기이기 때문이라기보다도 각자에게 맞는 거리 조정과 재정비를 위해서 쉼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며 내게 있어 이 길도 결국은 쉼표 같은 무언가가 아닐까.

한편, 테이블에서는 이웃집 아저씨가 어느새 타로카드를 꺼내어 사람들의 운명을 읽어주고 있었다.

마법사 같은 망토를 뒤집어쓴 형색이나 흔들리는 촛불에 반사되어 일렁이는 아저씨의 눈빛이나 제법 그럴싸한 폼이었다.

사람들도 진지하게 타로카드 읽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궁금해진 나도 순서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 길의 전령이 아저씨의 입을 통해서 내게 지령을 내려올 지도 모르잖아.

끊이지 않는 빗소리 속에 그렇게 밤이 깊어져갔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