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소원을 들어주는 십자가
15_
언제나 그렇듯 계획이 변경되어 그냥 사라와 함께 길로 돌아왔다.
타로카드가 관계됐던 신비의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이 되자 상쾌한 공기와 아름다운 하늘이 나를 유혹했다.
길 떠난 순례자들의 뒷자리를 정리하고 알베르게를 깨끗이 청소하고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내 마음은 이미 창밖의 길 위에 있었다.
비가 오던 어제는 그렇게 걷기가 싫더니 맑은 하늘을 보자마자 걷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다니 인간의 마음, 참 간사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라가 자신과 함께 길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제안해왔다.
결국 얼씨구나 짐을 싸서 길로 나섰다.
친절한 주인부부는 왜냐고 묻지도 않고 그저 길이 부를 때는 그에 응하는 것이 이곳의 순리라며,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될 거라고 말하고는 점심 때 먹으라고 하몽, 치즈, 토마토, 양파가 들어간 보카디요까지 싸줬다.
인사하려고 엘리야를 찾았지만 어디에 갔는지 도통 보이질 않았다.
함께 한참을 찾다가 사라의 눈에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것을 보고 그냥 떠나자고 했다.
엘리야가 일부러 우리를 피해 있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어딘가에서 사라와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베르게를 떠난 뒤 젖은 흙과 풀냄새, 낡은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으른 개나 고양이가 있는 풍경을 한참동안 말없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침묵을 깨기로 했다.
“사라, 혹시 엘리야랑 무슨 일 있었니?”
“아니. 그냥, 더 이상 가면 안 될 것 같았어.”
“왜? 그 브라질남자 때문에? 대답하기 곤란하면 말 안 해줘도 되고.”
“우리 사이에 곤란하긴. 뭐랄까, 우선 엘리야는 아직 어려. 그리고 내 마음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에게 상처주고 싶지 않았어. 브라질남자와는, 머리에선 사랑이 끝났다고 말하는데 내 마음은 계속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혹시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돼. 엘리야랑 키스할 때도 자꾸 그 남자가 눈에 어른거리고. 그래서 상황이 더 진전되기 전에 떠나기로 한 거야. 사실, 그렇잖아. 이러다가 내가 오히려 엘리야에게 빠져들 수도 있어. 하지만 엘리야는 자신의 음악에의 꿈을 펼치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젊고 자유로운 영혼이잖아.”
“알았어. 그래, 잘 했어. 네 마음 다 이해해. 어쨌든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로 시간을 낭비하기엔 우리의 인생이 너무 짧잖아. 그저 즐겁게 이 길을 걸어가자고.”
“네가 함께여서 너무 고맙고 기뻐.”
“나도 그래.”
사라는 아직 브라질남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나눈 사랑은 짧지만 강렬했고 그 남자야 어땠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에게 있어서는 그간 그녀의 인생에 있었던 많은 한계를 한꺼번에 깨뜨리고 완전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했던 특별한 경험이었으니 그 여운의 불꽃이 쉬이 사그라질 리가 없었다.
아마도 한동안은 그녀가 만나게 될 남자들은 숙명처럼 그 남자의 유령과 싸워야 할 것이다.
사라가 원하는 것은 열정과 안정인데 엘리아의 경우 열정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안정이라는 단어는......
떠도는 예술가의 영혼에 그런 단어가 존재하기는 할까.
그렇다면 브라질남자와 겪었던 사랑의 결과와 별다른 차이점이 없을 확률이 높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확률이나 예측 같은 것을 비웃는 이상한 감정의 덩어리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마음이 그런 불안을 감지하는데 굳이 그 신호를 무시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만약 사라와 엘리야에게 이어진 강한 인연의 끈이 있다면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겠지.
혹은 브라질남자와 사라가 다시 만나게 되든지.
누구든 그들이 서로 다시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인가 말 것인가는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더 이상 뱃속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를 무시하고 걸을 수가 없어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길가에 자리를 잡았다. 배낭 속에 잘 모셔뒀던 먹음직스러운 보카디요를 꺼내 입에 무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비쩍 마르고 기다란 검은 개가 한 마리 타나났다.
녀석은 이제 막 알베르게 주인이 챙겨준 정성을 음미하기 시작한 우리를 실로 처량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까만 코에 하몽의 냄새가 얼마나 감미롭게 느껴졌을까.
처음에는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녀석의 눈빛이 너무나도 집요해서 결국 빵 조금과 하몽 약간을 떼어 던져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맛있게 주어진 음식을 먹더니 슬그머니 우리 곁을 떠나갔다.
검정개가 비록 순례자는 아니었지만 이 순례자의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음식을 얻어먹으며 살아왔을 터이니 어쩌면 우리가 준 음식은 녀석이 징수한 일종의 통행료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아차, 녀석 엄청 말랐던데 조금 더 떼어줄 것 그랬나 하고 후회가 됐다.
혹시나 하고 둘러봤지만 멀리 갔는지 꽁무니도 보이지 않았다.
“세라, 뭐 찾는 거 있어?”
“그냥. 아까 개 말랐었는데 음식을 좀 더 나눠줄 걸 그랬나, 좀 후회돼서.”
“그만큼이 녀석의 몫이었던 거야. 얼른 가자. 조금만 더 가면, 소원을 들어주는 십자가를 만나게 될 거야.”
“소원을 들어주는 십자가?”
“응. 너 몰라?”
“몰라.”
“사실 정확히 말하면 소원을 들어주는 십자가는 아니야. 스페인어로 크루스 데 이에로(Cruz de Hierro)라고 하는데, 해석하면 ‘철로 된 십자가’야. 옛날에 켈트족이 언덕에 돌무더기를 쌓아 산신에게 순탄한 여행을 기원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순례자의 길 언덕배기를 넘어가는 켈트족 중에서 누군가가 돌무더기를 만들고 그 위에 철 십자가를 세운 모양이야. 이후 그 앞을 지나가던 순례자들도 돌무덤에 자신의 돌을 하나씩 더하며 앞으로 남은 여행길에서의 안녕을 기원하게 된 거지.”
“그럼 소원을 들어준다는 건 뭐야?”
“뭐 별 건 아니고, 자신의 고향에서 가져온 돌이나 물건을 얹으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대.”
“그래? 에이, 미리 알았다면 나도 뭔가 준비해올 수 있었을 건데. 하는 수 없지. 그냥 돌멩이 하나 주워서 얹으며 무사히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게 해달라고나 빌어야겠다. 사라 넌 고향에서 뭔가 가지고 왔어?”
“당연하지, 내가 일하는 도서관 앞에 뜰이 있는데 거기서 돌을 하나 주워왔지.”
“소원은?”
“그것만은 지금 이야기해줄 수 없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호기심 많은 아가씨!”
십자가에 도착해보니 맑고 쾌청하던 날씨가 어느새 돌변하여 흐릿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띄었다. 그래서였는지 예상외로 사람도 별로 없었다.
돌무더기 위로 올라가니 들은 대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원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각양각색의 물건들이 있었다.
나와 사라가 발을 딛고 선 이 돌무더기의 일부는 오래 전부터 세계 각국의 어디선가 여행을 해서 여기까지 온 돌멩이들일 것이다.
나는 전 세계를 관통해서 흐르는 돌멩이의 강을 상상해봤다.
아주 천천히 굴러와 이렇게 돌무더기에 안착하는, 소원을 간직한 이상하고도 아주 거대한 돌멩이의 강을. 그럼 돌무더기가 강의 끝이란 이야기이니 철 십자가가 우뚝 솟은 돌무더기는 호수가 되는 셈인가?
엉뚱한 생각은 관두자.
사라는 벌써 배낭을 내려놓고 윗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내들고 눈까지 감은 채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원하는 듯했다. 나도 돌멩이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그래도 혹시 몰라서 일단 배낭을 뒤져보기로 했다.
의외로 쉽게 내가 원하던 것들을 찾았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