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어떤 이별
과거의 나에게
한 남자를 그토록 사랑했던 나. 이제 그는 네 곁을 떠나갔어.
물론 그는 어떠한 형태로든 네게 남아있겠지만 그래도 더 이상 현재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아니겠지.
네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 사랑은 과거 속에서만 빛날 뿐이야.
그러니 이제 보내주자. 깨끗하게 잊어주자.
친구가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자.
하지만 그게 우리를 힘들게 한다면 망설임 없이, 깨끗하게 싹둑 그와의 관계라는 끈을 잘라내자.
여기 스페인 순례자의 길 철 십자가에 너를 두고 가려해.
미안하지는 않아. 짊어지고 가기에 너는 내게 너무 무거워서 버겁거든.
나는 현재를 살아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니까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줘.
너를 놓고 가는 대신에 난 이제 행복해질 거야.
너도 내 행복을 빌어줘.
안녕.
현재의 나로부터
편지를 서울에서 들고 온 플라스틱 약통 크기에 맞추어 몇 번이고 접었다.
처음엔 장난스럽게 시작했는데 막상 편지를 쓰기 시작하니 내 마음도 엄숙해져서는 심각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종이와 펜은 영국에 있을 적부터 쓰던 것들이고 내가 두고 가려는 과거의 나도 영국에서의 인생의 한 부분인데, 한국에서 가져온 약통 속에 그것을 담아 이곳에 놓고 갈 수 있으니 효험이 있을 거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어쩌면 이제는 정말이지 제이미를 사랑했던 나의 과거와 결별해야 하는 순간이 왔음이 확고하게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으리만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제이미라는 존재를 내 인생에서 마치 없었던 것처럼 지울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과거를 회상하며 지금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를 고통스럽게 바라만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산티아고로 향한 길을 걸으며 나는 달라졌다.
스스로를 먼저 챙기는 나로 돌아온 셈이랄지.
하긴, 제이미도 항상 말하지 않았던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라고.
‘과거의 나’가 든 약통을 기둥 어딘가에 다른 사람들의 추억들과 함께 묶고는 이별을 고하고 다시 사라와 길로 향했다.
“뭔가 열심히 적는 것 같던데. 뭘 그렇게 열심히 적었어?”
“그냥, 과거의 나와 이별했어.”
사라가 설명 안 해줘도 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녀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만 했다.
무엇이냐니까 대답하길, 사흘 전부터 다시 브라질남자와 연락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둘이 다시 잘 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브라질 남자는 ‘네가 그리워서 미칠 것 같지만 우린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여전히 같은 말만 되풀이했단다.
그녀의 눈에는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사라를 꼭 안아주었다.
그것 말고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 뒤로도 며칠 사라는 침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함께 있는 나에게 미안했는지 애써 환한 표정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얼굴이 환해지면 환해질수록 짙어지는 그림자를 보면 나는 알 수 있었다.
브라질남자 때문이겠지.
***
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초록의 덩어리가 조금씩, 조금씩 가을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점차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하는 가을과 아직은 아니라며 떠나기를 주저하는 여름의 모습을 굴곡이 있는 산 속 오솔길에서, 넓게 펼쳐진 포도밭에서, 재미없게 뻗은 교외 마을의 도로 위에서 발견하며 산티아고로 향한 여정을 계속했다.
그런 중에 사라가 결국 떠났다.
해안가를 따라가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 북쪽 루트 어딘가에 있다는 브라질남자를 만나러 간 것이다.
처음에는 말릴까도 생각해봤지만 함께 있는 내내 수시로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안절부절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괴로워져서, 사라에게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르다보면 결과를 알 수 있을 테니 힘내라고 말해주고 떠나보냈다.
아예 다른 루트로 가버린 사라를 언제 다시 마주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그나마 우리가 만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미리 수첩에 적어둔 그녀의 이메일과 전화번호가 있으니 원하기만 한다면 잠시 끊어진 인연의 끈 정도는 곧 다시 이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상했던 마음도 조금은 위로가 됐다.
하지만 사라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가임기의 여성에게 매달 찾아오는 손님이 오셨는데, 통증이 없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대신 독감이라도 곧 걸릴 사람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뼈마디 사이사이로 몸을 지탱해온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열이 오르는지 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도저히 사람이 많은 알베르게에서 미지근한 물로 급하게 샤워하고 벼룩이 있을지도 모르는 삐걱거리는 2층 침대로 들어가 혹시 있을지 모를 코골이 때문에 귀마개를 끼고 침낭 속에 들어가 잠들고 싶지 않았기에 하는 수 없이 호텔을 잡았다.
기본적인 시설만 갖춰진 저렴한 방이긴 했지만 나만을 위한 침대와 TV, 책상, 욕실이 있었다.
뜨거운 물로 긴 샤워를 하고 휘청휘청 걸어 나와 침대로 몸을 던졌다.
세제 냄새가 아직 남아있는 빳빳한 이불을 턱 바로 밑까지 끌어올리니 곧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외롭다’는 느낌이 무거워진 눈꺼풀에 무게를 더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는 내가 조금도 보고 싶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다정한 모녀였는데.
엄마 생각 때문이었는지 꿈속에서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내 방에서 엄마와 나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아무 말도 없이 울기만 했다.
가물가물해진 줄로만 알았던 그곳이 냄새까지 너무나도 생생하고 선명하게 다가왔고, 우리의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라기보다는 애틋함의 눈물이었다.
완전하게 혼자가 된 북부 스페인의 어느 작은 마을의 호텔 방에서 외로웠던 나에게 꿈속에서나마 안길 수 있었던 엄마의 품안은 한없이 따뜻하기만 했다.
to be continued.....
******* 이 글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