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전 산문집 <그냥, 사람>
출판인들이 꼽은 2020년 ‘올해의 책’으로 알게 된 <그냥, 사람>(홍은전 지음, 봄날의책 2020)을 읽었습니다. 좋은 책이리라 기대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자꾸 저렸습니다. 불편했고 충격적이었고 무서웠어요. 하지만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곱씹어야겠다는 생각에, 제 필력의 한계에 속상해하며 이번 레터를 씁니다.
<그냥, 사람>은 13년간 노들장애인야간학교에서 일했고, 인권·동물권 기록활동가로 현장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작가 홍은전의 산문집입니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일상, 세월호 유가족의 목소리, 중화상 사고 생존자의 고립된 삶, 시설 밖에서 자립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 젊은 나이에 ‘과속 사회의 희생양’이 되어 자살과 산재와 교통사고로 죽은 이들의 이야기를 또렷하게 풀어냅니다.
작가는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 홈리스, 병든 노인과 같은 약자를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한 사람들, 이 세상의 브레이크 같은 존재들”(p79)로 호명합니다. 우리 사회가 야만적으로 질주하며 이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 왔기에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책을 읽으며 생과 사를 가르는 최전선에서 분투하다가 세상을 떠난 많은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별생각 없이 걸어 다니는 지하철 계단이 누군가에겐 아득한 절벽이며, 수많은 휠체어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유유히 움직이는 서울의 저상 버스와 오르락내리락하는 엘리베이터 너머에 얼마나 많은 이동권 투쟁과 황망한 죽음이 있었는지도요. 지금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씁쓸한 사실도요.
터미널까지 오는 데 17년이 걸렸는데, 대구까지 가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걸릴까요. ‘장애인과 함께 버스를 탑시다’라는 말을 하는 데 그의 인생 전체가 필요했습니다. (...) 누군가의 평생이 있어야만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상식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고통스러운 위로입니다. (p128-9)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들 옆에 서자 세계가 온통 문제투성이로 보여서 나는 정말로 충격받았다. 내가 타고 온 버스도, 지하철도, 내가 다닌 학교도 모두 문제였다. 나는 마치 중력이 다른 행성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그건 경쟁하는 세계에서 연대하는 세계로, 적응하는 세계에서 저항하는 세계로, 냉소나 냉담보다는 희망을 더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공동체로 이동하는 것이다. (p247)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가벼운 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이완의 자세>(김유담 소설, 창비 2021)를 폈습니다. 딸의 시선으로 여탕 세신사로 일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인데요, 술술 읽다가 다음 문장에서 눈길이 멈추었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여탕이 온갖 사람들이 구별 없이 드나드는 곳처럼 개방되어 있어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멀쩡한, 너무도 멀쩡한 몸을 가진 사람들만 자신 있게 벌거벗은 채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란 게 눈에 보였다. 목욕탕에서는 체력 소모가 컸다. 대중탕은 그것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 오갈 수 있었다. (p84)
<그냥, 사람>을 읽으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질문들이 되살아납니다. 상상력의 한계, 무지와 맞닿아 있는 한탄이기도 합니다. ‘너무도 멀쩡한 몸을 가진 사람들’로만 가득한 사회만을 상상해 왔구나, 불편한 문제들은 시선과 마음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 버린 채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운 4월입니다. “이야기가 된 고통은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한다. 나는 이 위로와 연대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p162)는 책 속 문장에 기대어 힘을 내어 봅니다. 지금 나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냥, 사람> 저자 홍은전 칼럼 읽기
• "무겁지만 읽어주셨으면 하는 책" 홍은전 작가 인터뷰
• <그냥, 사람>을 만든 박지홍 봄날의책 대표 인터뷰
틈틈이 뉴스레터 33호는 변두리에서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책과 영화를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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