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감정 기입장

by 스누즈

어느새 밤공기에 실려오는 계절 소리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우렁차게 울어대던 매미들은 온데간데없고 불청객 같은 풀벌레 소리만 요란하다. 찌르르르 찌르르르. 가을 소리에 묻혀 한바탕 울고 싶은 마음이다. 아닌가 울고 싶은 내 맘을 계절이 토닥여주는 건가.

용돈의 지출 내역은 용돈기입장에, 집안 살림의 지출 내역은 가계부에 쓴다. 그렇다면 감정의 오고 감을 기록하는 곳은 감정 기입장이라고 부르면 될까.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난 아침은 다른 날과 다르게 기분이 좋았다. 아직 꿈속을 헤매는 큰딸을 품 안에 폭 안기도 하고 아침을 먹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제의 피곤함에 가득 찬 아이의 얼굴이 어찌나 예뻐 보이는지, 잠을 이기려고 용을 쓰는 미간의 주름조차 귀여워 보였다. 그렇게 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아침 시간의 한 조각을 보냈다. 아직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은 둘째의 얼굴은 말간 달님 그 자체였다. 이불속에 뜬 날 위한 보름달 같은 말간 얼굴. 행복이란 감정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왔다. 감정 기입장 쓸 오늘의 수입 부분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한 사람이 하루에 느끼는 감정의 정도는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끼는 모든 감정을 더하기 빼기 하여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엔 모두가 0점을 유지해야만 하는 법칙 같은. 그래야만이 다음날의 새로운 감정들을 다시 더하고 빼야 할 것이기에. 잔인하고 또 잔인하게 느껴지는. 가득 채운 행복하고도 찬란한 나의 감정을 다시 평균점으로 돌리려면 그만큼 아프고 슬퍼야 했겠지. 그래서 그랬던 거겠지.


오후의 난 한 사람을, 나이 든 남자의 노쇠해짐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한때의 그는 우리 모두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동시에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려 노력했던 존재였다. 그런 그가 무너져가 갔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모습을 보였다. 한 손에 쥐어질 것 같은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 같은 그의 두 다리는 그를 일으킬 수 없었다. 있는 힘껏 악다구니했던 그의 몸뚱어리는 이젠 나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약하디 약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애써 웃어 보였고 별일 아니라 큰소리쳤지만 마음 어딘가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난 알 수 있었다. 단단하게 쌓아져 있던 '아버지'라는 공간이.

하루의 절반 동안 너무 많은 감정들이 쏟아졌다. 행복, 찬란, 반짝임 그리고 아픔, 슬픔, 빛바랜, 무너짐. 감정 기입장 오늘의 공간은 다 채워져 버렸고 어느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버렸다. 생각했던 계획대로라면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 나의 감정지수는 영점이 되어야 하는데, 마음이 안정되어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플러스에 비해 마이너스의 범위가 커버려 한참을 바닥에 머물러 있는 내 감정.

말간 얼굴을 가진 두 딸과 앙상해져 버린 나의 아버지. 세 개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오늘 난 너무 많은 감정을 소비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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