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머물지 않은 바다를 본 적 있으신가요?
가끔 살랑거리며 작은 흔적만을 보여주고 떠나는 바람의 끄트머리.
따뜻한 햇살 한 줌은 반짝이는 윤슬만을 바다에 남겨놓았습니다.
잔잔하다 못해 침묵으로 가득 찼다고 해야 할까요? 철석 대는 파도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바다의 곁엔 한 아이가 있습니다. 사각거리는 모래 따윈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만히 앉아 바다를 바라봅니다.
오래오래 바다와 눈을 맞추며 시간을 보냅니다. 아이는 이런 시간이 너무 행복합니다.
아이가 사는 세상은 너무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희망, 기쁨, 미소 그리고 슬픔, 분노, 좌절 같은..
예쁜 것들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아이 역시 알고 있습니다.
빛이 있는 곳엔 그림자도 있는 것이니까요. 모든 색을 섞으면 결국 검은색이 되는 것이니까요.
얼마 전, 아이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아이를 든든히 지켜주던 아빠가 병에 걸렸던 거죠.
슬픔은 우울과 함께 왔으며 그 뒤엔 분노의 얼굴도 살짝 보이는 듯했습니다.
잔잔하기만 했던 아이의 마음에 세찬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곧게 자란 나무들은 뿌리가 보일 정도로 파헤쳐졌고 산책길의 돌다리는 무너져 버렸습니다. 바다는 화가 난 듯 하얀 포말을 뿜어내기만 했습니다. 아이의 눈물은 굵은 빗방울이 되어 마음 곳곳에 깊고 깊은 물웅덩이를 만들어 냅니다.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저 슬펐거든요. 병든 아빠의 작아진 뒷모습이, 아이의 손을 꽉 움켜잡은 가녀린 손가락이 커다란 눈물방울이 되어 아이의 빠알간 두 볼을 타고 내렸습니다. 아이의 얼굴엔 아빠의 존재만큼 깊은 눈물자국이 파였습니다.
문득 아이는 생각했습니다. 폭풍우에 내가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커다란 눈물방울에 내가 갇혀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사라진다고 내리던 비가 멈출까요, 내가 사라진다고 아빠의 병이 사라질까요? 소녀는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마음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것을요. 그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찬 장대비가 이슬이 되더니 점점 사라지는 게 아니겠어요. 차갑기만 했던 바람은 어느 순간 사그라들었습니다. 그제야 아이는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쓰러진 나무들과 무너진 다리, 엉망진창 모든 것들이 얽혀있는 마음을 보며 큰 숨을 몰아쉬어 봅니다. 흩어진 눈물방울과 감정의 쪼가리들을 차곡차곡 모아 밖으로 보내버립니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아이의 마음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쓰러진 나무 사이로 연둣빛의 싹이 돋아 오릅니다. 먹구름으로 가득 찼던 하늘은 푸른빛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다를 가득 채웠던 하얀 포말은 윤슬에게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모래지만 아이에겐 상관없습니다.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조용해지고 있는, 침묵을 향하고 있는 바다를 바라봅니다. 예전 와 같은 모습이 아닐 거라는 걸 아이는 알고 있습니다. 세찬 폭풍우로 바다의 온갖 것들이 뒤섞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아이에겐 폭풍우가 가라앉았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요.
언젠가는 아이의 마음에 폭풍우가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것이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두려울 테지만, 무서울 테지만 언젠가는, 그 어떤 것은 지나갈 것입니다. 지나감 뒤에는 연둣빛의 새싹이 자라고 있을 테지요. 세 잎 클로버일지 네 잎클로버일지 알 수 없지만 아이에겐 무엇이었든 연둣빛의 희망일 것입니다. 자그마한 희망 하나 손에 쥐고 아이는 바다를 바라봅니다. 가만히 그리고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