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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Dec 11. 2019

용기

잡지를 열심히 읽던 중이어서 처음엔 몰랐다. 무릎이 점점 간지러워지는 느낌이 났다. 1호선 지하철 안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옆자리 남자가 자기 무릎을 만지는 척하며 손으로 내 무릎을 쓰다듬고 있었다. 불쾌함보다 두려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애써 내가 예민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며 좌석의 간격을 띄고 고쳐 앉았다. 그 남자는 다시 내 옆으로 바짝 붙어앉아 내 무릎을 만졌다. 바로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는데도 어떤 사람인지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손에 땀이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확 째려볼까, 소리를 지를까, 날카로운 물건으로 찌를까... 실행하지도 못할 별별 생각을 하다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역에서 내려서 다음 열차를 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문이 열리고 지하철에서 내리는데 남자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린 자리에 가만히 서있을 수가 없어 플랫폼을 따라 앞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를 계속 따라오는지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거칠게 팔짱을 끼는 바람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뻔했다. 일면식도 없는 여자가 팔을 끌며 말했다. 언니 우리 같이 가요, 하고. 이 사람도 남자와 한 팀인가, 아니면 내가 알던 사람인가,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팔장을 끼고 걸으며, 여자는 내가 타깃이 된 것을 지하철 안에서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추행하던 남자가 나를 따라 내리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자기도 쫓아 내렸다고 했다. 그 상황을 지켜보고 남의 일임에도 나서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고마웠다. 따라오던 남자는 그 새 자취를 감췄다. 둘러봐도 사라지고 없는 것을 확인한 여자는 집까지 조심해서 가라는 말을 남기고는 휭하니 떠났다. 경황이 없어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그날의 일은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82년생 김지영'의 버스 남학생 이야기가 십여 년 전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그 때 뿐만 아니라 만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여러차례 불편한 경험을 했지만 매번 내가 자리를 피했다. 혼자일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라서, 또는 적극적으로 대응했다가 상대에게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지하철을 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자의 스마트폰에 몰입하고 있다. 치한들도 동영상 보기 바빠서 활동이 뜸한 것인지, 아니면 신고 체계가 강화된 탓인지 이제는 지하철에서 위험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별로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여성들의 주변도 한 번씩 살핀다. 난처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발견하고 도와주는 방법을 알려준 그때 그 여자를 생각한다. 나보다 더 용기를 냈던 그 사람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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