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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Dec 14. 2019

송년회

송년회에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20대에 만나 함께 운동을 했던 동호회 멤버들이 어느덧 학부모들이 되어있다. 후배들 앞에서 '라떼는 말이야'를 꺼내지 말라며 조언을 해주고, 아직도 비밀번호에 전 여친의 생일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허물없는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뜬금없이 지하철을 탈 때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지하철에서 오해받지 않으려면 어떤 자세로 서있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남자들 사이에서는 꽤나 진지한 안건인 것 같았다. 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양손을 합장한다, 차렷 자세, 무조건 뒤돌아선다... 온갖 팁과 경험담이 쏟아지고 그걸로 모자라 상황을 재연하는 것을 보며 눈물나게 웃었다. 빽빽한 지하철을 타며 서있는 방향과 포즈를 고민하는 이들의 출근길이 그려졌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촉을 세우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은 이 투박하고 무딘 남자들도 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행동에 꽤 신경을 쓰고 있었다.


얼마 전 신수정 님의 페이스북 피드에서 '규제가 생기면 정작 개선이 필요한 사람은 당당하고 오히려 선한 사람들이 위축된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피해를 주는 사람의 문제 행동을 제한하기 위한 장치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현실을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셈이다. 남녀 문제에 대해 예전보다 강화된 사회적 제재는 사람 간에 생각과 표현이 다름을 알게 해주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나 행동으로 불미스러운 일에 얽힐 수도 있다는 걱정을 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 예전보다 조금 더 오버해서 조심하고 있다.


주말마다 가족을 데리고 부모님 댁에 간다는 사람에게 너무하는 거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이고, 회사에서 절대 외모에 대한 칭찬은 하지 말라고 마지막까지 당부하는 40대 아저씨들의 모습이 귀엽다. 조직에서 열심히 버티고 험한 세상에서 부딪히며 젠더 감수성을 학습하는 노력도 대견하게 느껴진다. 평범하고 선한 사람들이 자신과 관련 없는 일에 마음 쓰면서 살지 않도록 혼돈의 시기가 어서 지나가 주기를 바랄 뿐이다.



송년회엔 피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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