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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Jan 05. 2020

나는 단골이다

한 동네에서 오래 살면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가게 사장님들이 있다. 새로 개발한 맥주를 평가해 달라며 시음을 요청하는 펍 사장님, 나의 취향을 알고 무채색 옷만 골라 코디해주는 옷 가게 사장님, 가게에 자리 잡자마자 평소 잘 먹는 어묵만 골라 내놓으시는 오뎅바 사장님. 열심 고객인 나는 가게를 자주 방문하고, 주변에 은근슬쩍 입소문을 내고, 온라인 공간에 방문 후기나 평점을 구체적으로 잘 써주는 노력을 하며 단골의 의무를 다한다.


며칠 전, 우연히 네이버에서 동네 가게 이름을 검색하다가 업소와 관련한 새로운 기능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이름하여 '영수증 리뷰'. 매장을 실제로 방문하고 실물 영수증 사진을 인증한 사용자만 남길 수 있는 후기이다. 바이럴 마케팅 업체들의 홍보 글이 범람하며 블로그가 신뢰를 잃어가니 대안을 고민하다 만들어진 기능인 듯했다. 내가 자주 가는, 동네에서는 꽤 잘 알려진 가게를 탐색해봤다. 업체 정보의 최상단에는 최악의 평점과 불만 가득한 영수증 리뷰가 적혀있다. 불만의 핵심 내용은 '불친절'이었다.


그 가게는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커피집이다. 성실한 사장님은 수년째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 8시면 어김없이 문을 연다. 트렌드에 맞게 새로운 커피 메뉴를 개발하고, 새벽에 가락시장에서 사 오는 신선한 과일을 얹어 와플을 만든다. 그 커피점을 자주 이용하는 고객들은 실물 영수증 따위는 받지 않는다. 카드에 충전해서 바코드로 결제하고 사용 내역은 카톡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커피의 맛이나 음식의 품질에 대한 비판도 아니고 본인에게 친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혹한 평가를 남긴 뜨내기 고객의 한 줄짜리 리뷰를 보니 내가 화가 날 지경이었다. 온라인의 다양한 채널에 밝지 않은 사장님은 이런 사용자 리뷰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것 같았다.


동네 사람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사장님과 눈을 마주치고 인사한다. 손님이 많을 땐 순서를 조금 기다려야 하지만 매장이 북적이는 모습은 그저 흐뭇하다. 가게가 오픈 준비 중일 때면 사람들은 빈 의자에 앉아서 기계가 데워질 때까지 기다린다. 손님이 몰릴 때는 눈치껏 자리를 비워주고 테이블을 치워주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매일 미소 짓고 매일 친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다 한 번씩 내 감정을 쓰는 것이 피곤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그런 날은 나도 필요한 주문만 후딱 끝내고 나오기도 한다. 인사 없이 휙 나와버려도 미안하지 않은 대형 커피숍을 이용하기도 한다. 주인이라고 그런 날이 없을까. 감정의 기복은 누구에게나 있다. 친절 에너지가 고갈되는 날도 있고 고민이 있어 머릿속이 복잡한 날도 있겠지. 그렇다 해도 손님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사장님의 태도가 나긋나긋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불친절이 아니라 무뚝뚝함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에서 공효진은 '당신이 지불한 안주 값에는 손목 값과 웃음 값은 없다'라고 단호하게 외친다. 영업에 도움이 되는지 모를 웃음과 친절은 소비자가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아닌 것이다.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다고 누구나 볼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 분풀이를 하는 것이 과연 소비자의 당당한 권리인 걸까.


가게를 생업으로 하는 동네 사장님들은 대체로 SNS 같은 뉴미디어에 익숙하지 않다. 좋아요 하나 누를 시간에 재고를 기록하고 매출을 고민하고 틈틈이 개인 용무도 처리해야 한다. 혼자 가게를 운영하며 매일 반복되는 일을 쳐내기에도 가뜩이나 시간이 부족한데, 블로그 후기며 배달 앱 후기며 영수증 후기 같은 평판까지 직접 관리해야 하는 현실은 참 팍팍하다.


동네의 작은 점포들은 지친 일상에서 내가 위로를 받는 공간이기도 하다. 사장님들이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며 힘을 얻을 때도 있다. 동네 가게 사장님들이 오래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이웃이며 팬이며 이들의 지원군인 나는, 오프라인 세계에서는 열심히 가게를 방문하고, 온라인 세계에서는 팬심 넘치는 리뷰로 뜨내기 사용자들의 리뷰를 밀어내며 사장님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평판을 관리한다. 단골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모여서 사장님들이 오래 버티는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단골에게 사장님이 딸기를 몇 개 더 올려주는 것은 안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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