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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Jul 25. 2020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누가 샀는지 모를 신영복 선생의 책은 항상 거실 책꽂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책 제목의 서체가 예스러워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장식품처럼 꽂아 놓고만 있었다. 에세이나 칼럼을 읽을 때 신영복 선생의 문장이 자주 인용되는 것을 보면서 고전처럼 한 번쯤은 읽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으로 책을 꺼내 들었다.


옥중 서신이라 하니 술술 읽힐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이 책은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고 해석하며 읽는 책에 가까웠다. 한정된 지면에 생각을 옮겨 적어야 했던 까닭이었을까. 오랜 생각 끝에 만들어진 듯한 문장 속에는 단어 하나 표현 하나마다 생각이 밀도 있게 압축되어 있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대에 시작되어 40대에 이르기까지 스무 해의 징역 생활을 하는 동안 신영복 선생이 가족에게 보낸 서신을 모은 책이다. 편지의 수신인은 주로 부모님과 형수님, 계수님이다. 편지 속에는 과거의 기억 한 조각을 떠올리며 꺼내는 이야기가 있고, 조카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궁금해하는 삼촌의 애정이 드러나며,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미원 내기 축구시합을 하는 교도소 안의 풍경, 욕설을 서슴지 않는 재소자들의 일상을 묘사하기도 한다.


재소자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것에서 생각의 씨앗이 만들어지는가 보다. 동료들끼리 체온을 모아 추위를 이겨내는 겨울에는 냉방이 가르치는 벗의 의미를 되새기며 편지를 쓴다. 혼자 내복을 챙겨 입은 날에는 동료들에게 죄송하지 않고 따뜻할 수 있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편지에 담는다. 화단에 핀 꽃을 보고는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편지를 쓰고, 마음이 답답한 날은 발치한 이를 몰래 15척 담 밖으로 던져버리고는 '일부분의 출소'로 마음을 달래며 글을 쓴다.


책을 읽으면서 외롭고 긴 감옥 생활에서 가장 힘든 상황이 무엇일까 상상을 해보았다. 어쩌면 생각만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힘든 일이 아닐는지. 생각이 생각을 불러오고 그때마다 일어나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정신적인 형벌이다. 무기수의 감옥 생활에서 글쓰기는 감정을 해소하는 탈출구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밑바닥 세계의 재소자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것 또한 괴로운 일이었을 텐데, 일기처럼 생각과 감정을 써 내려간 편지 글에는 수인들의 행동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내용이 없다. 오히려 그들과의 생활 속에서 찾은 교훈이나 새로운 관점을 이야기한다. 신영복 선생이 불행 속에서도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던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은 이런 태도에서 기인한 것인가 보다.


그렇게 담담한 내용으로 쓰인 편지에서 아주 가끔, 미약하게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할 때가 있다. 그중 한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요약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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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소자들은 사람의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 지위, 재산, 학벌 등에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는 드러나지 않은 불우하고 어두운 모습을 찾아 가학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악의적인 시선이며, 자신이 가진 결함과 비슷한 점이 발견되면 안도하는 고약한 심사이다.


수의를 입은 사람들에 대해 사회가 가지는 타락의 기대 수준이 있는데 (이 사람은 이 정도로 나쁜 사람일 거야 하는) 재소자들은 감옥에 들어와 수의를 입는 순간 스스로도 타락의 기대 수준에 맞추어 예의, 염치, 교양까지 벗어버린다. 상황이 사람의 많은 부분을 굴절시키는 것이다.


징역살이를 하면서 생긴 가학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은 유감스럽지만, 한 편으로 이는 껍데기에서 벗어나 가식 없는 실체를 보는 소중한 통찰이기도 하다.


- [타락의 노르마]를 읽고 정리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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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범죄의 낮은 형량이 일상화된 현재를 사는 나에게, 반정부 활동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한 교수의 삶은 아무리 보아도 비현실적이고 이해하기 어렵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지식인의 젊은 시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안타깝다.


책을 읽으며 글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가치관을 보았고, 누누이 강조하는 '관계'에 대해 생각했고, 고달픈 옥살이 가운데 실낱같은 웃음을 주는 익살을 느꼈고, 저자의 뛰어난 표현력이 느껴지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공감했다. 글을 읽다 보면 저자의 생각뿐 아니라 편지에 쓰인 섬세하고 고운 표현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마음에 든 문장 하나를 인용하며 마무리한다.


동향인 우리 방에는
아침에 방석만 한 햇볕 두 개가 들어옵니다.
저는 가끔 햇볕 속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수한 무지개를 만들어봄으로써
화창한 5월의 한 조각을 가집니다.


                          - [속눈썹에 무지개 만들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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