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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만보 Dec 02. 2019

화장실 꿈

화장실에 가는 꿈을 자주 꾼다. 공중 화장실이 지저분해서 들어가지 못하는 꿈. 들어가긴 했지만 오물을 피하느라 애쓰는 꿈. 인터넷에서 꿈해몽을 찾아보면 이런 꿈은 답답한 상황,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나의 경우 실제로 신경 쓰이는 일을 앞두고 있거나, 과민한 상태일 때 화장실이 꿈에 나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어릴 때부터 벼락치기가 주특기였다. 공부 건 발표 건 간에 미루고 미루다가 하루나 이틀 전에 집중력을 바짝 올려 준비하면 그런대로 효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어릴 때는 이게 꽤 잘 먹혔지만,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고 닥쳐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습관이 점점 통하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한 번은 고등학교 때 친구의 시가 교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특별히 친했던 그 친구는 내게 학교 축제에 전시할 시화 꾸미기를 부탁했다. 이렇게 저렇게 만들면 되겠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다가 하루 전에 준비를 시작했는데, 재료 구입, 꾸미기, 글씨 쓰기까지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결국 친구의 작품은 축제 당일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전시되었다.


대학교 첫 시험 때도 대책 없는 나의 벼락치기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시험에 임박해서 평소처럼 노트를 펼쳤는데 범위가 상상을 초월하여 시험 전 날 밤을 꼴딱 새웠음에도 거의 백지상태로 시험지를 제출하고 말았다.


학생 시절 경험한 몇 차례의 끔찍한 기억은 사회인이 되어 발표나 행사에 앞서 조바심을 떨며 유난스럽게 준비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시간 단위로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강박에 시달리는 완벽주의 성향이 뒤늦게 생겨버린 것이다. 이런 성격이 나 스스로 피곤한 것을 넘어 때로는 주변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만드는 것을 보며, 한창때 나태하게 살았던 것에 대한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제는 지저분한 화장실 꿈을 꾼 날이면 또 뭐가 하나 시작되는구나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나 자신을 들들 볶을 준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어차피 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나의 옆구리 살 같은 숙명이라 생각하고 품을 수밖에.


인터넷에서 주운 똥 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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