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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효봉 Nov 29. 2015

나부터 잘하면 돼

많이 추워졌다.

평소 때보다 더 껴입고 장갑까지 챙겼다.

아이들도 잘 챙겨 입고 나와야 할 텐데.

추워서 좀 걱정이긴 하다.


오늘은 청주로 간다.

4학년 아이들과 함께.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팀이다.

이번 여행이 세 번째 여행.

지난 두 번의 여행을 통해 내가 느낀 건

이 아이들은 노는데 굶주려 있다는 거다.

공부 많이 시키는 걸로 소문난 지역에서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첫 여행에서는 당연히 내 눈치를 봤지만

안 놀면 혼난다는 내 말에 마음을 푹 놓고

완전히  정신없이 놀아대며 오늘에 이르렀다.


엄마들에게 인사하고 차가 출발하자

아이들은 본색을 드러내고 놀기 시작한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기 쎈 아이들끼리  한두 번 정도 싸워준 다음

또 뭐 재미있는 거 없나 하고 궁리한다.

잠시 썰렁하다.


그러다 여자 애들이 외친다.


"나 좀 웃겨봐~"

"나도 좀 웃겨봐"

"나도"

"나도 나도"


남자 애들은 여자 애들을 웃겨보겠다고

온갖 성대모사와 이상한 노래들을 동원한다.

재능 없는 개그맨 지망생 같은 아이들의 공연에 웃는 건 나 뿐이다.

난 그저 여자 아이들의 무표정이 웃겨서 웃었을 뿐. 허허.

 

이런저런 놀이를 하다 결국

아이들은 역할놀이를 하며 논다.

나는 엄마, 나는 아빠, 나는 오빠, 난 아기 등등

저마다 역할을 맡고 엄마 시늉, 아빠 시늉에 열을 올린다.


엄마 왈 "여보~ 오늘 뿡뿡이 생일이니 퇴근하고 일찍 들어와요"

아빠 왈 "알았어~ 마치고 바로 올게"

엄마 왈 "또 PC방 갔다가 오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아빠 왈 "그래 그래 알았다고!! 밥이나 줘!"

뿡뿡이 왈 "엄마~ 오빠가 나 때려"

엄마 왈 "증말 이럴래? 이거 빨리 안 치워?"


대체 저게 왜 재미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끝도 없이 역할 놀이를 하며 논다.

그렇게 놀다 보니 어느새 청주다.


청주에서 첫 일정은 고인쇄 박물관.

그 이름도 유명한 직지에 대해 공부하러 왔다.

입구에서 아이들에게 몇 가지 주의를 주고 입장.

첫 전시물에서 직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아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실종되는 아이들이 점점 늘더니

이젠 아무도 없다. 나만 남았다.

실내에 낙엽이 날아다닌다고 느낀 건 착각일까?


아이들은 더 재미있는 걸 보겠다고

이미 다음 전시실로 가 버렸다.

나는 내 나름대로 오랜 경험을 토대로

재미있게 설명한다고 자부해왔는데   

고인쇄 박물관도 이미 수차례 왔다 갔는데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엉망이 되는 건..


참 오랜만이다.. 쩝..


내  마음속에서 아이들을 탓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4학년인데도 아기처럼 구는구나'

'진짜 말 안 듣네'

'내가 만만한가 봐'

'도대체 이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거야?'


또 다른 변명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내가 한동안 6학년, 중학생 애들하고만 다녔더니 감을 잃었나 봐'

'다른 사람들이 많아서 휩쓸려 갔나?'


80%의 분노와 20%의 핑계가 만나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상황은 같다.

사실 당장 아이들에게 가서 불호령을 내리면

지금 상황은 금방 정리가 될 것이다.

가장 말썽쟁이,  그중에서도 성격 좋은 남자아이에게

나의 분노를 쏟아내면 다른 아이들도 그 분위기를

눈치채고 어쩌면 순한 양이 될지도 모른다.

갑자기 표적이 된 남자아이는 잠시 억울하겠지만

약간의 회유책을 동원하면 금방 풀어지리라.


하지만 경험상 그건  임시방편이 될 뿐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지금보다 약간 무서운

권위적인 선생이 된다고 아이들이 달라질까?

아이들은 그저 내 앞에서만 잠시 그런  척할 뿐이다.

사실 달라질 필요도 없다. 달라져야 할 건 '나'


그렇다고 사라진 아이들의 뒤꽁무니를 쫒아다니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난 박물관 출구로 가서 반대방향으로 전시실을 돌았다.

그러다 반란의 선봉에 섰던 아이들을 만났다.


"헐, 쌤~  순간이동했어요? 아까 우리 뒤에 있었는데?"

"순간이동은 선생님의 기본능력이지. 호그와트에 온 걸 축하한다"

"쌤이 무슨 덤블도어예요?"

"내가 그렇게 늙었냐? 저기 영상 보러 가자~"


전시실 가운데쯤에 금속활자를 만드는 영상이 상영 중이다.

반란군 선봉부터 앉혀두고 좀 기다리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와서 앉는다.

우리뿐이라서 영상을 보며 저게 뭐하는 장면인지 설명해주었다.

의외로 아이들은 집중해서 시청했고

한두 명이 내 설명에 '우와~'를 외치자

나머지도 덩달아 '우와~'를 외친다.

어깨가 으쓱해진다. 나도 참 단순하다.

근데, 덤블도어보다 내가 낫지? 히히.


이후로 박물관은 순조롭게 관람했지만

나머지 일정에서 아이들은 또 반란을 일으켰고

그때마다 난 땀 흘리며 순간 이동과 각종 마법(?)으로

유능하고 나이 든 마법사 덤블도어로 빙의했다.

일정을 끝내고 지친 덤블도어는

아이들에게 자유시간을 명령했고

아이들은 그 명랑한 웃음으로

청주에 쌓인 눈들을 끌어모아

눈싸움을 즐긴다. 좋아 죽네 아주.


마지막엔 저마다 눈덩이를 양손에 들고

쉬고 있는 덤블도어를 찾아왔다.

씨익 웃는 그 아이들의 눈빛.

눈덩이가 날아온다.


그렇게 오늘도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내가 아이들과 여행하는 일을 시작하고

한동안은 계속

아이들에 대한 원망

이 일에 대한 회의

희망이 없어 보이는 현실에 대해

분노와 변명, 고민만 반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은

내가 잘해야 하는 것이다.

누굴 탓하고 원망할 거리가 아니다.

나부터 잘하면 된다.


사실 아이들이 선생님 설명을

귀담아서 잘 들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그들도 알건 다 안다. 순한 양처럼 굴어야 사랑받는다는 걸.

하지만 재미에 이끌리는 게 본능인 것을 어쩌랴.


아이들에게 선생님에 대한 예의를 지키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사실 그런 태도와 자세를 가르치는 것이 직지에 대해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무턱대고 태도와 자세를 강요할 순 없는 일.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설득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선생님부터 잘하면 된다.

부모부터 잘하면 된다.

어른부터 잘하면 된다.

내가 잘하면 된다.


교육은 그렇게 시작된다고 생각해본다.



* 호그와트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학교입니다.

* 덤블도어는 그 호그와트의 교장 선생님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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