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값 커피

by 서효봉

커피.

하루를 구원해주는 멋진 음료다.


하루의 사이클을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오전을 보낸다.

오전엔 그래도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일을 처리한다.

점심을 먹고 날이 따뜻해지면 잠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몽롱하게 오후를 지나 배가 고파오면 곧 저녁 때다.

저녁을 먹고 TV를 좀 보다 할일을 마치면 잠이 든다.


하루 중 가장 아쉬운 시간은 점심 먹고 몽롱한 때다.

사실 이 시간에 일들을 제대로 처리하면

저녁이 여유롭고 하루가 뿌듯해진다.

각성이 필요한 시간이다. 각성하라. 각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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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그런 면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한잔 마시고 나면 정신이 또렷해지고 일에 집중이 된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난 특히 커피로 효험을 보는 체질이다.

물론 커피 마시고 집중하고 나면 번아웃을 경험한다.

집중력을 쓴만큼 피로가 몰려오기도 한다.

그래도 커피를 계속 마시는 이유는 내가 원할 때 에너지를 주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글을 쓸 때면 커피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조용한 곳에서 장시간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꿈나라로 향하는데

커피라도 한잔해야 가출한 정신이 지구로 돌아온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에는 커피 자판기가 없다.

이게 무슨 석기시대적인 도서관인가 싶지만 이 도서관엔 그런 기계가 없다.

도서관 게시판에 이용자들의 자판기 설치 건의가 자주 올라오는데

그럴때마다 깨끗한 환경 조성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이 올라온다.


아무튼 그래서 커피를 마시려면

아라비카 백프로 원두를 엄선, 볶은 다음 갈아서 거름종이로... 블라블라

하던지 아니면 믹스 커피를 품에 넣어 와 뜨거운 물이 나오는

정수기 주변을 은밀히 배회하다 때를 기다려 커피를 타 먹던지 해야 한다.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도서관 밖으로 나가야 한다.

도서관 앞 대로를 건너면 작은 편의점이 하나 있다.

난 보통 여기서 캔커피를 사 온다. 귀찮으니까.


오늘도 변함없이 캔커피를 사러 가는데

문득 편의점 캔커피가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방 가서 4000원 넘는 커피도 마시는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지만

별다방은 분위기라도 좋지 않은가?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커피란 녀석은 몸값이 너무 뻥튀기 된 존재다. 별다방도 각성하라.

여튼 캔커피가 1300원이라니 하는 생각에 오기가 생겼다.

주변에 분명 마트가 하나쯤은 있을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품고 탐색에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니 글 쓰기 싫어서 괜한 헛짓을 한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마트 탐색 여행에 나서 배낭여행 하듯 주변 사람들에게

어디 마트 없냐는 탐문 수사를 벌였다. 역시 묻는 게 최고다.

생각보다 손쉽게 하나로 마트를 찾았다.

도서관에서 2~300미터 남짓 떨어져 있다.


짜짠. 같은 커피가 550원이다.

순간 기쁨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올랐다.


'얏호~ 반값 커피를 찾았다!'

'헐 그럼 난 여태 550원 짜리를 1300원씩이나 주고 사 먹었단 말인가?'


갑자기 편의점 알바생이 미워지고 도서관과 편의점이

무슨 밀약이라도 맺은 게 아닐까하는 음모까지 떠올랐다.

감정이 요동친다. 그러다 또 다른 내가 이야기한다.


'비싸면 안 사먹으면 될 것 아닌가? 가까우면 그만큼 비쌀수도 있지!'

'아니야 그래도 이건 좀 너무 하잖아! 같은 걸 어떻게 이렇게 파냐고?'


캔커피를 손에 쥐고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동안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도서관 앞 계단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달달함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바람이 분다. 꽃씨들이 날린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람들이 걸어간다. 무심히 자동차가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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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합리적이지 않다.

인간은 많은 일들을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처리하며 살지만,

실상 우리 주변의 문제는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많은 일들이 감정의 문제이고 합리성이라는 이름은 시스템으로만 남아 있다.

그 시스템을 굴리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합리성의 세계로 출근하고 퇴근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소모되는 감정들은 인간을 정말 힘들게 한다.


세상이 정말 합리적이라면

왜 자살을 하고 왜 테러가 일어나며

누군가는 돈이 넘쳐 병들고, 누군가는 돈이 없어 죽어가는가?

여기서 1300원 하는 커피가 저기서 550원 한다고 분노해 쓰는 글이 아니다.

세상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건 사실 누구나 다 몸으로 느낀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에선 모순이 파티를 벌이고, 소설에선 이성이 변사체로 발견되는데

눈을 감고 막연한 합리성만을 기대하고 산다는 건 이중적인 일이다.


우린 알고 있다. 감정이 설 곳이 필요하다는 걸.

이 합리성의 궁전에서 반값 커피를 홀짝일 때에도

갑자기 웃음이 날 수 있고 눈물이 흐를 수 있다.

감정을 숨겨야만 잘 살 수 있다는 건 너무 야박하지 않나.

내 감정도 네 감정도 사이 좋게 인정 받는다면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애써 분노할 필요가 없다.


그냥 한번 생각해봤다.

각성하면 뭔 말인듯 못하랴.


커피.

나를 각성시키는 멋진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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