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말이와 커피

by 서효봉

퇴근하고 룰루랄라 집에 왔다. 오늘 저녁은 계란말이. 실패한 경험이 많아 두려운 상대. 계란말이. 허나 냉장고파 계란님들을 하루빨리 처단(?) 해야 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야채를 썰었다. 우선 백선생님의 레시피 영상을 정밀 시청했다. 핵심은 욕심 버리기다. 야채는 한 주먹만. 기름 조금. 불은 약불로. 서두르지 않는다. 마음을 비운다. 명심하겠나이다.


프라이팬에 열이 오르자 기름을 살짝 부었다. 배운 대로 키친타월로 코팅하듯 기름을 골고루 발라주었다. 불을 줄이고 계란물을 넣는다. 조금만. 역시 뭔가 다르다. 계란말이에 실패한 지난날의 상처들이 스쳐 지나간다. 순조롭다. 3번째 계란물을 넣을 때까지 무난하게 통과. 와. 정말 계란말이 같다. 이제 마지막 4번째. 근데 남은 계란물이 많아 보인다. 백선생님이 4번 나눠 넣으랬으니 이번이 마지막? 너무 많이 남았는데? 손이, 말을 안 듣는다.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냥 다 부었다. 망한 느낌. 나와의 싸움에서 졌다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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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초반 선방 덕분에 계란이 팬케이크가 되는 위기는 막았다. 하지만 마지막 한 겹이 너무 두껍다. 그리고 소금 좀 더 넣을걸. 후회가 남는다. 그러면서 계란말이는 맛있게 냠냠. 역시 나와의 싸움은 쉽지 않다. 계란말이를 제대로 하려면 도부터 닦아야겠다. 그렇다고 가부좌 틀고 폭포수 아래 앉아 도 닦을 수야 있겠는가? 그저 엄숙히 뒤집개 들고 천천히 계란 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도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에헴.


저녁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미뤄둔 작업을 시작했다. 점심을 먹으면 반드시 잠이 오듯 저녁도 먹으면 반드시 잠이 온다. 게다가 퇴근 이후. 잠이 쏟아진다. 의자에 앉아 모니터에게 꾸벅꾸벅 연신 고개를 조아리다 결국 헤딩까지 했다. 마법의 음료가 필요하다. 커피. 졸린 눈으로 커피 내리는 모습을 본 아내가 잘 밤에 무슨 커피냐고 핀잔을 줬지만 난 특수 체질이라 커피 마시면 잠이 잘 온다고 대꾸하고는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렇게 작업을 끝내고 자야 할 시간. 잠자리에 누웠더니 심장이 두근두근. 정신이 말똥말똥. 잡생각 무한리필. 잠이 안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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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뒤척이다 12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시계가 울리고 나는 후회했다. 커피, 마시지 말걸. 괜히 마셨어. 마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결과 이 같은 형벌을 받는구나. 죽겠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또 나와의 싸움에서 진 것인가? 그것도 참지 못해서 이런 후회를 하는가?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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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계란말이 좀 잘못되면 어떤가? 커피 마셔서 늦잠 자면 또 어떤가? 아무도 나에게 계란말이 잘해야 한다고, 일찍 자야 한다고 강요한 적 없다. 나는 나 혼자 그리 생각하고 나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겼느냐 졌느냐를 따지고 그것으로 자존감을 정하는 이상한 일을 매일 반복한다. 결과는 잘해봐야 본전이다. 못하면 어리석은 놈이 되는 것이고.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가끔 그런 의문이 든다. 내가 나에게 취할 행동. 그게 과연 싸움뿐인가? 내가 나에게 해 줄 말. 정말 ‘어리석은 놈’ 이 한 마디뿐인 걸까? 요리하느라 애썼구나. 늦은 밤 커피까지 마시며 일하다니 대단하다. 내가, 나의, 손을 잡는다. 조금 가까이 다가간다. 그래. 소중한 너의 하루. 고생 많았다. 누가 뭐라고 한들 너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알아. 그러니 마음 편하게 살자.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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