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테러리스트

by 서효봉

‘패테’라는 말을 아는가? 몰라도 괜찮다. 얼마 전까지 나도 몰랐으니까. 그냥 몰랐으면 좋을 뻔했다.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으니. 어느 주말,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여행을 떠났다. 그 날은 방학을 보내고 오랜만에 아이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모임 장소에 줄 서 있던 아이들은 나를 보더니 씨익 웃는다. 나도 덩달아 씨익 웃었다. 인사를 하고 차에 탄 아이들. 뭐라고 자기들끼리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한 여자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옷을 왜 그렇게 입어요? 패테에요?”

“패테?”

“예. 패테. 이런 셔츠엔 청바지를 입어야죠!”

“근데 패테가 뭔데?”

“패션 테러리스트. 그것도 몰라요?”


blue-jeans-2160265_1280.jpg


테러리스트라니. 흐흐. 선생님에서 테러리스트까지는 금방이다. 한마디 말에 패테가 되었다. 하긴 그 날 패션이 좀 그렇긴 했다. 반팔 셔츠에 청바지를 입을까 했으나 이렇게 더운 날 청바지라니! 게다가 오늘은 언덕을 오르는 일정이 있다. 역시 세상 편한 옷은 등산복이지. 바지라도 등산복을 입자. 흰 반팔 셔츠와 검은 등산복의 조합. 패테가 탄생했다. 나는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자기들끼리 나를 포함한 수많은 패테들의 활약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끔찍한 사례를 공유하며 뜨겁게 공감하던 아이들이 갑자기 자지러지게 웃는다. 웃겨 죽는다. 귀를 기울여보니 한 아이가 또 하나의 단어를 발견했단다. 그게 뭔데?


“패고요”

“패고는 또 뭔데?”

“패션 고자요.”

“뭐? 고..고자?”


고자라니. 이런 말 써도 되나 싶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 아이들이 나를 고자라 부른다. 아니 패션 고자라 부른다. 역시 사람의 운명은 한순간에 달렸다. 청바지를 입었어야 했어. 청바지를. 헌데 이 날씨에 그 답답한 청바지를 입었다간 정말 그게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같이 든다. 아, 생각을 말자. 이후 아이들의 패션 평가는 학교 선생님들께 옮겨 갔고 난 놀림에서 벗어났다. 학교 선생님 안 하길 잘했다.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 모르겠지만 뭐 일단 안 한 걸로. 수많은 학교 선생님들이 희생되었고 난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죄송합니다. OO초등학교 선생님들. 앞으로 청바지를 입으세요. 꼭.


musician-349790_1280.jpg


돌아보니 나는 대학시절에도 패테였다. 패고까진 아니고. 중, 고등학교를 남자들만 버글거리는 남중, 남고를 다닌 탓도 있겠지만 교복만 6년 입었으니 패션 감각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관심도 없었고. 그러다 대학에 가니 여자 사람들이 있었고 그녀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친구들이 입는 옷을 분석해 이렇게 저렇게 입어보았지만 그럴수록 평범해지는 건 왜일까? 점점 더 평범해지다 존재마저 없어질 지경이다. 그때 동아리방에서 한 선배가 패션 이야기하는 우리에게 물었다. 옷 잘 입으면 뭐가 좋은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옷 잘 입으면 뭐가 좋을까? 뒤이어 그 선배는 이 한마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너희들 자신한테 좋은 일을 해.”


역시 선배는 선배다. 나한테 좋은 일이라. 헌데 그게 뭔가요?라고 물었어야 했는데. 이미 그 선배는 산신령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더 물어볼까 봐 도망간 걸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옷을 잘 입는다는 건 남 좋은 일 시키는 것 아닌가? 그들 보기 좋은 옷을 내가 걸치고 보기 좋다는 칭찬 한 마디 듣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게다가 더 억울한 건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지 않는가?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완성은 힘든 것이다. 제기랄.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린 각자 나름대로 살지만, 참 많이 흔들리며 산다는 생각. 주변 사람들의 말 한마디. 표정. 시선.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평가에 목을 매고 연약하게 흔들린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너무 크게 흔들리면 결국 맥없이 부러지거나 주변 사람을 다치게 할 것이다.


nature-3275498_1280.jpg


들꽃. 내가 사랑하는 들꽃. 바람이 불면 들꽃들은 흔들리지만 또 금방 제자리를 찾는다. 바람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하며 산다.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그 연약한 생명은 그렇게 살아도 예쁘다. 아니 그렇게 사니까 아름답다. 진정한 패션은 그런 게 아닐까?

이전 10화그게 내 선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