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인재는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일단 작업실로 참고서와 수능 관련 책을 몽땅 옮겨놓아야 했다. 여행용 가방 안에다가 책을 가득 채워 끌고 갔다. 작업실은 혼자만의 공간이라 서재 주인장도 함부로 출입할 순 없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작업을 아니 공부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날마다 도서관으로 미친 듯이 뛰어가던 인재는 여유로운 오늘 아침이 낯설게 느껴졌다. 작업실 책장에 책을 꽂았다. 책장 아래쪽에 책을 거의 다 꽂아갈 무렵, 등 뒤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언어영역의 정석, 영어 한방에 해결해, 수학의 달인.”
쪼그려 앉아 있던 인재는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라 엉덩이를 땅에 대고 앉아버렸다. 뒤돌아보니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책장에 꽂힌 책 제목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던 아이는 인재에게 물었다.
“아저씨, 소설 쓰는데 이런 책도 필요해요?”
인재는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으응, 넌 누구니?”
“저요? 강민정인데요.”
“그래, 민정아. 여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야.”
민정은 인재를 간단히 무시하곤 책장 앞으로 가 영어책을 한 권 뽑아 들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책을 대충 넘기던 민정이 말했다.
“에이, 이런 수준 낮은 책을 어디다 쓰려고 가져왔어요?”
초등학생이 고등학생 영어책을 넘겨보곤 수준 낮은 책이란다. 인재는 허세 부리는 꼬마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꼬마야, 이건 영어라는 거야. 알파벳은 배웠니?”
민정은 넘기던 영어책을 책장 세 번째 칸에 대충 던져 넣곤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저씨, 소설가 맞아요?”
인재는 또 한 번 뜨끔했지만, 능청을 떨었다.
“응, 뭐.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랄까?”
“근데, 왜 소설책은 하나도 없어요? 이런 게 다 뭐래요?”
“아, 이거. 요즘 구상하는 소설 주인공이 고등학생이라서 끌어 모아봤어.”
민정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책장을 훑어보고 있었다. 인재는 그런 민정의 등을 문 쪽으로 떠밀며 말했다.
“꼬마 아가씨, 오빠가 소설을 써야 하니 좀 나가줘요.”
“예, 예. 알겠습니다. 아저씨.”
의외로 민정은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안 나간다고 생떼 부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인재는 뭔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애가 어떻게 여기 들어왔지? 엄마하고 소설책 사러 왔다가 옆길로 샜나? 인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 녀석. 처음부터 끝까지 아저씨라고 부르네. 다음에 보면 확실히 이야기해 주겠다며 혼자 중얼거렸다.
오후 2시 50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동영상 강의를 보다 졸던 인재는 정신을 차리고 작업실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아침에 왔던 그 꼬마가 서 있었다. 민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탄식했다.
“헐.”
아직 잠이 덜 깬 인재가 찢어지게 하품을 했다.
“어? 너 아직 안 갔어?”
“제가 어디 가야 해요?”
“집에 가야지. 엄마 걱정하시겠다.”
“아저씨 걱정이나 해요. 입에 침 좀 닦고요.”
인재는 입 주변에 묻은 침을 닦으며 말했다.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어른들은 늘 피곤해.”
“그래요. 피곤하죠. 아저씨 같은 타입은 특히.”
“야, 너 근데 왜 자꾸 아저씨라 그래?”
“그럼, 아줌마예요?”
인재는 자기 앞에 있는 게 어린애인지 어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무슨 일?”
“3시부터 소설가 모임이 있어요. 응접실로 나오세요.”
그렇지. 매주 무슨 모임 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게 오늘이구나. 인재는 뭐라도 들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메모지와 펜을 챙겨 응접실로 나갔다.
응접실엔 어제 우연히 만나 인사했던 소설가들이 와 있었다. 동혁, 준수, 희경, 루키 순서로 앉아 있었는데, 민정도 그들 사이의 빈자리에 앉았다. 인재는 가볍게 인사하고는 루키의 옆자리에 앉았다. 왠지 모르게 다들 긴장한 표정이었다. 동혁과 준수는 노트 같은 걸 들여다보고 있었고, 희경은 눈을 감은 채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인재가 루키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꼬마도 이 모임에 참석하나요? 이거 소설가 모임 아니에요?”
“아, 민정이요? 민정이도 소설가예요. 문학상도 받았는걸요.”
“예? 아직 초등학생 같은데 소설가라고요?”
“저도 처음엔 놀랐어요. 잘 모르지만 소설 영재? 천재? 뭐 그런 거 같더라고요.”
소설 영재라. 인재는 태어나 그런 영재가 있다는 건 처음 들어봤다. 민정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응접실에 앉아 5분쯤 기다리자, 소설가의 서재 주인장 영래가 들어왔다. 마치 조직의 보스가 등장한 것처럼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래는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제일 상석에 앉았다. 소설가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