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인 사람은 7명. 서재 주인장 영래가 인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했다. 인재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잘 부탁한다는 말 한마디만 덧붙였다. 왠지 분위기가 엄숙해서 길게 말할 수가 없었다. 10초 정도의 침묵이 흐르고, 주인장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모임을 시작합시다.”
동혁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지난번처럼 하시는 거죠?”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동혁은 민정을 바라보며 능청스레 2번 손뼉을 쳤다.
“아, 왜 맨날 나만 시켜요?”
민정은 얼굴에 불만을 가득 담아 1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손에 뭔가를 들고 올라왔다. 목을 길게 빼고 보던 인재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젠가라는 보드게임이었다. 쌓아 놓은 나무 블록을 무너지지 않게 하나씩 빼내는 보드게임. 엄숙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널따란 테이블 위에 작은 나무 블록들이 쌓여 갔다. 인재는 이걸 왜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쳐다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준비가 끝나고 동혁이
“인재씨는 오늘 처음이니 열외고요. 루키씨부터 시작하세요.”
라고 말하자 루키가 밑에서 세 번째 칸에 있는 블록을 과감하게 빼냈다. 젠가는 처음엔 쉽다. 문제는 하나, 둘씩 빼내다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을 때다. 잘못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쯤 느껴지는 아슬아슬함이 핵심이다. 루키, 희경, 민정, 준수, 동혁 순으로 블록을 빼는데 2바퀴쯤 돌고 나니 여기저기 구멍 뚫린 묘한 모양이 되었다. 이젠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다. 희경이 기적적으로 블록 하나를 빼냈다. 애처럼 좋아하는 희경 옆에 진짜 애가 긴장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야속한 블록 탑은 민정이 손을 대자마자 와장창 무너졌다.
“에헤이, 이거, 야, 아이고,”
각종 탄식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민정은 울상이 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은근한 승리감을 얼굴에 드러냈다. 인재는 자던 사람 불러서 젠가 하는 게 소설가의 모임이라니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주인장이 말했다.
“오늘은 민정이 소설이네요.”
민정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소설 쓴 부분을 펼치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말했다.
“준비됐어요.”
영래는 응접실 테이블 밑에 있는 서랍을 열고 투명한 약통 하나를 꺼냈다. 도시락 크기의 약통엔 색깔별로 알약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뚜껑을 열고 빨간색, 파란색, 하얀색 알약 가운데 하얀색 알약을 하나 집어 들어 삼켰다. 인재와 민정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나씩 삼켰다. 인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거 무슨 약인가요?”
옆에 있던 루키가 말했다.
“수면제 같은 거예요. 이야기에 집중이 잘 되죠. 한번 먹어볼래요?”
“예? 잠들면 이야기를 어떻게…”
성질 급한 동혁이 하얀 알약 하나를 인재 손에 쥐여주며 재촉했다.
“일단, 먹어봐요. 안 죽어.”
인재는 좀 찜찜하긴 했지만 다들 기다리는 눈치라 동혁이 준 하얀 알약 하나를 삼켰다. 다들 눈을 감았다. 인재도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조금 전까지 작업실에서 자다가 나왔는데 과연 잠이 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 약간 나른해지면서 몸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저절로 소파에 편하게 앉게 되었다. 민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2121년, 하늘엔 2개의 태양이 떠 있다. 태양계에 갑자기 날아 들어온 또 하나의 태양 때문에 세상은 떠들썩했다. 과학자들은 태양계의 균형이 무너져 조만간 궤도를 이탈하는 행성들이 속출할 것이라 내다봤다. 세계 정부 UNG의 5대 의장인 칼 마르크스는…”
인재는 꿈을 꿨다. 생생한 꿈이었다. 미래의 하늘엔 정말 2개의 태양이 떠 있었다. 통신 기술이 극도로 발달해 뉴스가 곳곳에서 전해졌다. 어디서라도 벽면을 터치만 하면 뉴스가 전해졌고, 인터넷을 검색할 수 있었다. 소문이 무성한 시대였다.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뉴스를 타고 곳곳에서 들렸다. 뉴스에선 과학 기술을 거부하는 신비주의자들의 집회가 열렸다고 했다. 그들은 세계 정부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쳤고, 뉴스에 속지 말라고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세계 정부와 신비주의자들의 갈등은 무력으로 번졌고,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고 뉴스는 전했다. 죄 없는 어린이들까지 희생되었고, 학교가 파괴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미래엔 대체 방송사가 몇 개인지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은 채널에서 종일 뉴스만 나왔다. 뉴스가 끝나면 또 뉴스가 나오고 그 뉴스는 다음 뉴스를 예고하고 마무리 지었다. 끝나는가 싶으면 다시 뉴스가 시작되었다. 골치 아픈 뉴스만 꺼버리면 세계는 조용했다. 평화로운 듯 보였다. 미래는 그런 곳이었다.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인재만 쳐다보고 있었다. 민망해진 인재는 고쳐 앉으며 말했다.
“지금 몇 신가요? 제가 얼마나 잔 거죠?”
루키가 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음, 30분쯤?”
동혁이 팔짱을 낀 채로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 처음 할 때가 제일 오래 가. 생생하기도 하고”
준수가 인재에게 물었다.
“인재씨, 좀 놀랐죠? 어땠어요?”
“신기하네요. 소설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희경이 헝클어진 머리를 고무줄로 다시 묶으며 말했다.
“이거 중독성 있어요. 인재씨도 나중엔 이 시간만 기다릴걸요?”
루키가 민정을 보며 이야기했다.
“민정, 소설 재미있던데? 어떻게 그런 생각 했어?”
민정은 가방을 챙기며 웃었다.
“산큐. 오지상.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전설의 밤>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소설가들은 민정의 소설에 대해 10분쯤 더 이야기하다 각자 자기 작업실로 돌아갔다. 서재 주인장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인재는 묘한 경험을 해서 그런지 작업실로 돌아와서도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엔 계속 두 개의 태양이 떠 있고, 뉴스가 떠들어대는 장면이 무한 반복되었다. 또 잠이 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