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나만 몰랐었던 이야기 3

헤어질 때 뭐라고 했더라

by 올대리

"어? 그쪽으로 가?"

영화를 취소한 탓에 시간이 붕 떠서 용희를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던 참이었다. 학교는 반대방향인데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게 귀엽다.

"아 맞다."

"바보. 맨날 가는 학교인데도 잘 모르네."

"하하. 굳이 데려다주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야. 가는 길인데 뭘."

"버스 곧 온다. 얼른 가."

버스 정류장 전광판을 본 용희가 말했다.

"타는 거 보고 가지 뭐. 같이 기다려 줄게."

"아니야. 진짜 괜찮으니까 먼 저 가. 또 연락할게."

"아 그래... 알겠어. 조심히 가~"

또 연락을 할 거라니. 참 서운한 말이다. 꼭 나만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버스 기다리면서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저렇게까지 극구 사양하며 손을 젓다니. 이것도 서운하다. 온종일 서운했지만 더 멋진 우리의 미래를 위해 참기로 했다.

'미래의 약사님. 공부 열심히 해서 얼른 약사 되세요.'




홀로 백화점에 갔다.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옷이 예쁘긴 진짜 예쁘다. 하여튼 변용희, 보는 눈은 있다니까. 이런 스타일도 좋아할 줄은 몰랐다. 샤랄라 하고 귀여운 것만 고집하는 줄 알았는데. 흰 셔츠와 청의 조합은 캐주얼하면서도 은근한 섹시미를 준다. 게다가 이렇게나 몸에 피트 된 옷은 더더욱. 몸매가 더 좋아 보이게 카메라 방향을 아래로 해서 사진을 찍었다. 필터를 씌운 후 인스타에 올렸다. '남자 친구가 사준 옷♡' 반응이 올라올 동안 옷을 좀 골라봐야겠다. 이 옷이랑 비슷한 스타일을 찾아볼까나.

지이이잉. 정소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디냐"

"신촌 백화점이야. 왜?"

"데이트 중이야?"

"아니. 데이트는 다 끝났고 혼자 쇼핑 중."

"하... 그래. 끊는다."

"뭐야? 왜 전화한 건데?"

"됐어. 끊는다."

전화가 끊겼다. 왜 전화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심심한가. 정소영은 종종 심심하면 전화했다 안부를 묻곤 끊어버리곤 한다.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온다. 힐을 신고 돌아다녀서 그런가. 슬슬 집에 가야겠다. 옷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고, 용희가 좋아하려나. 새로 산 옷이랑 어울리는 용희의 셔츠까지 사면 분명 좋아할 것이다.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샤워를 하고 마스크 팩을 얼굴에 얹어 놓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개운하다. 아까 올린 사진 반응이 궁금해서 인스타에 들어갔다. 좋아요가 무려 96개다! 팔로워가 많은 편도 아닌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 역시 스마트폰을 거꾸로 들고 사진을 찍어야 다리가 길게 나온다. 물론 무슨 옷을 입느냐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지이이잉. 용희다. 웬일로 전화를 했지. 혹여나 목이 잠겼을까 봐 흠흠 소리를 내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난데. 자?"

"아직 안 자. 책 읽고 있었어."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럼 지금 잠깐 볼래? 내가 집 근처로 갈게."

"지금?"

"어... 잠깐이면 돼."

"그래! 오는 데 얼마나 걸려?"

"30분?"

"응! 나 부모님 몰래 나가는 거니까 10분 전에 다시 연락 줘~"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방금 붙인 마스크 팩을 떼어버리고 앞머리에 말고 있던 헤어롤을 집어던졌다. 오밤중에 찾아오는 남자 친구라니. 용희가 몇 번 데려다준 적은 있어도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진 않았다. 옷을 부랴부랴 갈아입고 화장을 가볍게 했다. 머리가 문제다. 들어와서 질끈 묶어놨더니 자국이 생겼다. 고데기가 데워지는 동안 향수를 뿌리고 귀걸이를 했다. 아까 레스토랑에서 용희가 전화를 받으러 나갔을 땐 그렇게 시간이 안 가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지. 똑같은 시간인데 준비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빨리 흐른다. 용희 주려고 산 셔츠도 내친김에 들고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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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

나는 뒤에서 용희에게 달려들었다.

"어 왔어?"

시큰둥한 반응이다. 저 주려고 큰 맘먹고 비싼 셔츠도 사 왔건만. 안 그래도 잘생겼는데 이걸 입으면 얼마나 더 잘생겨지려나.

"자, 이거!"

나는 셔츠가 든 쇼핑백을 내밀었다.

"아...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선물이지. 요즘 스터디 많은 거 같아서 힘내라고 준비했어. 열어 봐 봐."

"..."

용희는 말없이 쇼핑백만 쳐다봤다.

"은아."

뭔가를 결심한 듯 쇼핑백을 손에 꽉 쥐더니 용희가 말을 이었다.

"우리 그만 만나자."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유가 이별이었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놀라면 감각이 멈춘다더니 진짜였다. 순간적으로 귀가 멍해졌다. 세상이 일시정지라도 됐는지 내 시선은 오로지 한 곳만 향했다. 용희의 눈. 입은 얼어붙었고 몸은 마비가 온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예전에 공부하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몸이 잠깐 안 움직였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더하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시멘트 바닥에 망부석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뒤로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다. 아무런 기억이 없다. 방으로 돌아와 기억하려고 애써도 사고 회로가 멈췄는지 머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새벽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니 견뎌냈다. 생각을 멈춘 머리를 붙잡고 묵묵히 견뎠다. 날이 밝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날은 밝는다. 어둑했던 방에 빛들이 모인다. 여기에서 만나기로 약속이라도 했는지 우후죽순 쏟아진다.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그제야 침대를 벗어나 창밖을 봤다.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제법 있고 차들도 쌩쌩 다닌다. 좀 전까진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었는데. 생각보다 하루는 빨리 그리고 쉽게 시작된다. 내 기분 상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나는 하루가 시작하는 데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미개한 존재일 뿐이다. 그저 얹혀사는 점 같은 것. 최선을 다했다. 용희의 눈치와 안부를 살피며 용희의 취향을 알아가는 게 재밌었다. 바닥에 놓인 아직 뜯지도 않은 용희의 셔츠를 봤다. 무심한 햇빛은 내 속도 모르고 셔츠를 비춘다. 셔츠는 어두컴컴한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은 주인공이 됐다. 나는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너 오늘 눈이 좀 부었다?"

아침식사자리에서 언니가 말했다.

"어... 어제 늦게까지 공부했더니. 잠을 좀 설쳤네. 거의 못 잤어."

나는 민망한 듯 눈을 만지며 대답했다.

"이따 방으로 쿨링기 하나 갖다 줄게. 붓기 좀 빼고 나가."

"어... 고마워."

개강 당일 아침을 쿨링기와 시작해야 한다니. 그나저나 한숨도 못 자서 걱정이다. 틈날 때마다 커피를 마시며 잠을 쫓아야겠다. 언니가 가져다준 쿨링기로 부기를 빼고 나머진 화장으로 감춰야겠다. 푸석푸석하지만 웬만한 건 다 가릴 수 있다. 가방을 메려고 옷장을 열었다. 하필이면 쇼핑백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 보이는 구석으로 쇼핑백을 구겨 박았다. 하늘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