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상실의 길로 들어선 연애
계획을 다 세우고 금빛 다이어리를 덮었다. 침대로 기어 들어가 은은한 조명을 켜고 SNS에 들어갔다. 그때 용희에게서 톡이 왔다.
자?
평소 같으면 잤겠지만 오늘은 정소영 때문에 잠이 달아난 참이었다. 야호! 얼른 답장해야겠다.
아니! 왜에~?
내일 오랜만에 데이트할래?ㅎㅎ
응응 좋아! 어디서 볼까?
신촌 유플렉스 앞 3시.
알겠어! 잘 자~♡
반응 없는 짝사랑이라니. 아니었다. 정소영이 틀릴 때도 있는 것이다. 솔직히 정소영이 하는 말은 다 맞다. 워낙에 직설적이고 감정적이라서 말을 툭툭 뱉는 것처럼 보여도 생각이 깊은 사람이다. 생각을 깊게 해서 나온 결론을 뱉는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솔직히 좀 쫄았었다. 그래도 이번엔 확실히 정소영이 틀렸다. 내일 꼭 확인시켜줘야겠다.
정소영이 머리를 잘랐다. 처음엔 봤을 땐 숏컷이었는데 그동안 많이 길었더랬지. 긴 머리만 고수해 온 나와는 달리 정소영은 머리에 변화를 많이 주는 편이다. 빨주노초파남보 탈색은 기본이고 앞머리도 내렸다가 올렸다가를 반복한다. 자유자재다. 이번엔 똑 단발로 잘랐는데, 수수한 정소영의 외모와 아주 잘 어울린다. 정소영은 대체적으로 모든 헤어스타일을 잘 소화한다. 얼굴도 작고 갸름한 데다가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잘 놓인 상이다. 관리라곤 눈곱만큼도 하지 않을 텐데 저 정도면 훌륭하다. 화장으로 살짝 터치해주면 더 예쁠 텐데. 정소영 성격에 할 리가 없지.
"머리 잘랐네?"
"걸리적거려서 후려 처버렸어. 맘에 드냐?"
"내 맘에 들어 뭐해?"
"아님 가라. 약속 있다며."
"응. 안 그래도 지금 가려고. 그나저나 오늘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어제 할 일 다 하고 갔잖냐. 뭐 하러 일찍 오냐?"
"와서 개강 예습도 하면 얼마나 좋아. 이번엔 공부도 좀 하고 그래."
"1등이 할 만한 소리네. 1등 다워. 짝짝짝"
정소영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으휴"
나는 한숨을 쉬고는 정소영에게 귓속말을 했다.
"나 지금 용희 만나러 간다~ 데이트~"
곧바로 책상 위에 있는 커다란 파우치를 들고 신보사를 나갔다. 화장실로 가서 화장품을 펼쳐놓고 화장을 고쳤다. 3시간에 한 번씩은 수정해줘야 피부가 맨들맨들해 보인다. 여기에 적당량의 오일을 발라주면 민낯 같은 촉촉한 피부 표현이 완성된다. 마스카라를 한 번 더 덧발라주고, 살짝 웃은 상태에서 핑크빛 블러셔를 발라줬다. 수줍은 듯한 빨간 볼이 완성됐다. 입술 안쪽에만 틴트를 발라주고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고 데이트 장소로 갔다.
신촌에 도착했다. 그런데 용희가 안 보인다. 오늘도 늦으려나... 약속 장소를 샅샅이 둘러봐도 없다. 포기하고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봤다. 톡이 왔다.
30분쯤 늦을 거 같은데. 너도 아직 안 나왔지? 미안.
용희가 늦을 때마다 아직 안 나왔다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응응. 나도 그쯤 도착~
신촌 일대가 훤히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저 멀리서 용희의 얼굴이 보인다. 정말 오랜만이다. 2주 만에 봐서 그런가 더 잘생겨 보인다. 저 사람이 바로 내 남자 친구 변용희다. 잘 생겨서 봐준다. 나도 모르게 화가 스르르 풀렸다. 시계를 확인했다. 3시 40분. 40분이나 늦게 왔다. 노트북을 가져와서 다행이다. 계획에 차질이 안 생기게끔 미리 할 일을 쳐낼 수 있었다. 노트북을 접고 바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기다린 티가 날까 봐 5분만 더 앉아 있다 나가기로 했다.
"용희야!"
나는 손을 흔들며 용희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용희가 별로 반갑지 않은 표정이다. 내가 뭘 잘못했나.
"왔어?"
"응. 근데 오늘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데이트해도 괜찮아...?"
나는 용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오늘은 바지 입었네?"
용희는 세심한 편이다. 데이트를 할 때마다 치마만 입은 거 같아서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바로 알아보다니. 역시 눈썰미 최고다.
"오랜만에 입어봤지. 어때?"
"예쁜데... 난 치마가 더 예쁜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렇구나."
민망했다. 신경 많이 써서 입었는데. 갑자기 서운해진다.
"우리 2주 만에 보는 건데 옷 선물해줄까?"
용희와 백화점을 한 바퀴 돌았다. 용희는 내게 종종 옷을 사준다. 패션 철학이 확고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취향이 세련됐다. 용희가 골라주는 옷은 확실히 예쁘다. 칭찬에 박한 우리 가족이 괜찮다고 할 정도면 인정해줘야 마땅하다. 오늘은 레이스 달린 소매에 라인이 돋보이는 흰색 와이셔츠와 무릎길이의 딱 붙는 H라인 청스커트를 매치해줬다. 다행히 오늘 신고 온 구두와 잘 어울린다. 용희의 표정도 밝아졌다. 바지를 처음 입은 건 아니지만 오늘처럼 싫어하는 티를 낸 적은 없었는데. 계산을 끝내고 우리는 미리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이 집의 별미는 명란 파스타와 부채살 스테이크다. 용희의 추천으로 오게 된 곳인데 입소문이 퍼졌는지 이젠 예약을 해야 올 수 있게 됐다. 어젯밤에 미리 예약해놔서 다행이다.
"줄 되게 길다. 하마터면 많이 기다릴 뻔했네."
바깥은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그러게. 어떻게 알고 예약했어?"
"친구들이랑도 몇 번 왔었는데 맨날 웨이팅이 있더라고. 예약제 시작했다는 소식 듣고 얼른 예약했지. 잘했지?"
용희는 기다려서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오랜만의 데이트라 용희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응. 고마워."
밥을 먹는 도중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치마가 너무 조이는 듯하다. H라인 스커트는 몸매가 부각되는 옷이기 때문에 한 치수 작은 걸 사야 예쁘다. 불편해도 예쁜 게 우선이다. 남자 친구 앞에서 이 정도 불편쯤이야... 조금만 먹더라도 감수해야겠다. 볼록 나온 아랫배가 고스란히 보이는 옷이라 더 이상 먹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수저를 내려놨다.
"벌써 다 먹었어?"
"응. 배가 불러서."
"겨우 그거 먹고?"
"응응. 아까 신보사에서 정소영이 에그타르트 줬었거든. 소화가 덜 됐나 봐."
"아 그랬구나. 그래도 그렇지 너 정말 조금 먹는다."
"헤헤... 아 그건 그렇고, 나 머리 단발로 잘라볼까 하는데, 어때?"
"갑자기? 한 번도 자른 적 없잖아."
용희는 떨떠름한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오늘 누가 단발로 자르고 왔는데 너무 예쁘더라고. 그냥 그렇다고! 물론 난 자르지 않을 거야! 그냥 생각만 좀 해봤어. 생각만."
"그래. 넌 긴 머리가 더 예뻐."
그때 용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슬쩍 봤다.
'이민지? 누굴까.'
그러고 보니 난 용희의 지인들을 모른다. 용희가 주변 사람들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얘길 안 하니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미안. 전화 좀 받고 올게."
"응."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희는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시야에서 용희가 완전히 사라졌다. 파우치에서 거울을 꺼내 화장을 수정하고 치마를 만졌다. 예뻐지기 참 어렵구나. 치마가 몸을 조여 밥도 제대로 못 먹었건만 속까지 더부룩하다. 가스가 찼는지 콕콕 쑤시는 것 같기도 하고. 좀 전까지 용희가 앉아있던 자리를 쳐다봤다. 가방도 안 들고 왔구나. 누가 보면 집에 간 줄 알겠다. 음식물이 묻어있는 수저만 있을 뿐 아무런 흔적이 없다. 5분쯤 지났을까. 물끄러미 보고 있던 빈자리에 용희가 들어왔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 그냥. 통화는 잘했어?"
"응. 아 은아 근데..."
"응?"
"나 급한 스터디가 생겨서 학교에 가봐야 할 것 같아.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건데 미안."
평소 똑 부러지는 용희가 말끝을 흐리며 주저할 땐 다 이유가 있다. 보통은 스터디 아니면 집안일인데 자세하게 물어보고 싶어도 참아야겠다. 본인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붙잡고 어떻게 꼬치꼬치 캐묻겠는가. 물론 마음으로 이미 캐묻고 있지만.
"아... 스터디 전화였구나. 어쩔 수 없지 뭐! 공부해야 한다는데 어쩌겠어!"
나는 최대한 밝은 척하며 말했다. 오래간만에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려나 했는데 오늘도 실패다. 영화도 미리 예매해놨는데 취소해야겠다. 너무 사랑하고 너무 즐거운 연애도 좋지만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지금의 우리에겐 사치일 수 있다. 훌륭한 일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으면 그땐 그런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