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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균 Oct 06. 2021

우리 사이, 물과 기름

마술인의 분석

    그곳이 어린이집이었는지 초등학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먼저 작은 병 속에 식용유를 부어넣었다. 노란 액체가 병의 절반 정도를 채웠다. 나머지 절반은 물의 자리였다. 물을 천천히 기름 위로 붓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투명한 물은 노란 기름과 전혀 섞이지 않고 오히려 기름층을 뚫고 그 밑으로 가라앉아버렸다. 두 종류의 액체가 경계를 두고 분명하게 나뉘어있었다.


    시간이 지나 화학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그 이유를 배울 수 있었다. 물과 기름은 극성이 다르기 때문에, 극성인 물과 무극성인 기름은 서로 섞일 수 없다. 또한 기름이 물보다 밀도가 작기 때문에 물이 기름을 뚫고 그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때부터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당연해졌다.


    시간이 더 지나고, 나는 카드마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으로 샀던 마술 책 '에피파니2*'에는 오일 앤 워터(Oil and water)라는 카드마술이 실려있었다.


    카드는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있다. 스페이드와 클럽은 검은색, 하트와 다이아몬드는 빨간색이다. 마술사는 3~4장의 검은색 카드와 빨간색 카드를 교차한 상태에서 신호를 준다. 마술사의 신호와 함께 검정은 검정끼리, 빨강은 빨강끼리 분리된다. 왜냐하면 검은 카드와 빨간 카드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마술은 '오일 앤 워터' 이다.





효율 좋은 마술, 오일 앤 워터


    오일 앤 워터는 정말 독특한 마술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의 규모보다 관객이 경험하는 현상의 규모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막연한 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인 예시와 함께 살펴보자.


    3장의 검은 카드와 3장의 빨간 카드를 사용하는 오일 앤 워터를 생각해보자. 마술사는 여섯장의 카드를 교차로 섞는다. 그리고 신호를 주면 여섯 장의 카드는 색깔 별로 분리된다. 이 마술을 보고 관객은 6장의 카드 중에서 검은 카드는 위로, 빨간 카드는 밑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경험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동한 카드는 두 장뿐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이전 상태 : 검//검/빨//빨 


이후 상태 : 검//검/빨//빨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의 차이는 볼드체로 쓰여있는 두 장의 카드뿐이다. 마술사가 이동시킨 카드는 사실 두 장뿐이지만, 관객은 6장 전체에 걸친 현상을 느낀다. 두 장만으로 여섯 장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니! 장 수를 네 장으로 늘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전 상태 : 검//검///빨//빨


이후 상태 : 검//검///빨//빨


    이동하는 장수가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4장을 이동시켜 8장의 효과를 얻어냈다. 만약 이 마술을 숫자 카드 8장으로 바꾸었다면 그 효과는 미미했을지도 모른다.


이전 상태 : 1/5/3/7/2/6/4/8


이후 상태 : 1/2/3/4/5/6/7/8


    분명 신기하긴 했지만 제자리에 남아있는 1,3,6,8 카드가 분명히 거슬렸을 것이다. 오일 앤 워터 마술은 각각의 카드를 단지 '검은 카드' '빨간 카드'로 일반화시켜서 효과를 더욱 극대화시켰다.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보다 관객이 경험하는 현상이 더욱 크다. 오일 앤 워터가 클래식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오일 앤 워터의 엔딩


    오일 앤 워터 마술의 엔딩은 크게 두 종류다. 하나는 현상이 확대되는 '전체 분리' 엔딩이고, 나머지 하나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는 '에멀젼**' 엔딩이다.



    첫 번째 '현상의 확대' 엔딩은 간단하다. "마술을 맨 처음 시작했을 때 잘 섞여있던 카드 뭉치가 어느 순간 모두 정렬되어있다."  오일 앤 워터는 3장과 3장, 4장과 4장의 카드가 서로 분리되는 마술이다. 이렇게 카드를 소량 사용했을 때의 장점은 '분리'라는 현상을 잘 이해시켜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상이 미치는 범위가 카드 6~8장이라는 소량의 카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마술 현상의 규모가 작아진다는 단점도 있다.


    만약 오일 앤 워터 마술이 끝나고 남아있는 카드 뭉치까지 전부 분리된다면? 관객은 앞서 소량의 카드로 분리 현상을 이해했다. 마술의 결말에서 카드 전체가 분리될 때, 관객은 압도적인 규모의 마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공연의 마무리로도 좋은 훌륭한 클라이막스 현상이다.




    두 번째 '현상의 반전' 엔딩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는 섞인 카드가 분리되었으나, 마지막에는 분리된 카드가 섞인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본 것은 검정과 빨강이 교차된 상태에서 분리되는 마술이었다. 이를 뒤집어서 이번에는 검정과 빨강이 분리된 상태에서 시작하여, 교차된 상태로 만드는 엔딩이다.


    이 엔딩을 잘 표현하는 이름이 있다. 바로 알도 콜롬비니의 '이탈리안 드레싱'이라는 마술이다. 드레싱을 만들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재료 두 가지는 올리브유와 식초다. 원래라면 이 둘은 섞이지 않지만 요리사들은 '에멀젼'이라는 화학 현상을 사용해서 섞이지 않는 이 둘을 섞이도록 만든다. 실제로 '이탈리안 드레싱' 마술은 검정 카드와 빨강 카드가 교차로 섞이면서 끝이 난다.




    두 가지 엔딩 모두 훌륭하다. 아마도 몇몇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소량의 카드로 '에멀젼' 엔딩을 보여준 뒤에 남은 카드 뭉치가 분리되는 '전체 분리' 엔딩으로 마무리지으면 어떨까? 좋은 발상이지만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보자.


    만약 남은 카드 뭉치로도 '에멀젼' 엔딩을 낼 수 있다면 어떨까? 남은 카드 뭉치 모두가 검정과 빨강으로 나뉜 다음, 마술사의 신호와 함께 모든 카드가 검정과 빨강이 교차로 섞여있는 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이게 가능할까? 싶은 여러분을 위해 마술을 하나 소개한다.


    다윈 오티즈의 책 'Scams & Fantasies with cards***' 에는 이름부터 웅장한 '얼티밋 오일 앤 워터(Ultimate Oil and Water)' 라는 마술이 실려있다. 이 마술은 처음에는 단순히 6장이 분리되고 섞이지만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는 52장의 카드 전체가 분리되었다가 다시 섞인다!





우리 사이, 물과 기름


    오일 앤 워터 마술은 서글픈 마술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분리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고, 믿는 종교가 다르고, 살고있는 세대가 다르다.  2021년의 지금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격렬한 성 갈등 역시 우리가 분리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일 테다. 검정 카드와 빨강 카드를 분리하듯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분리되어가고 있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단지 자신이 있어도 될 곳을 찾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다는 확신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다. 이는 마술인들의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참 슬픈 일이다. 여성들이 그들의 힘듦에 대해 이야기하면 '꼴페미' 이야기를 듣고, 남성들이 그들의 힘듦에 대해 이야기하면 '한남' 소리를 듣는다. 50대의 중년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 '꼰대' 소리를 듣고, 20대의 청년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 '온실 속 화초'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이제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 대화도 하지 않는다. 그저 겉으로 보기에 괜찮은 관계를 이어갈 뿐. 서로 이해하려 노력하기는 커녕 이해하기를 포기한다. 형식적인 대화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행복하고 다채로워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점점 더 불행해지고 외로워질 뿐이다.


    이 시대는 어떻게 '에멀젼' 될 수 있을까?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검정 카드와 빨강 카드는 마술을 통해 서로 섞인다. 마술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마술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마술이 진짜 마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시대, 분리의 시대에는 어떤 마술이 필요할까? 나는, 우리는 어떤 마술을 할 수 있을까?







* 헤카테, [Epiphany 2], 렉쳐노트, 2013

**emulsion 유화(乳化)라고도 부른다. 물과 기름처럼 평상시에는 서로 섞이지 않는 물질을 흔들거나 젓는 등으로 에너지를 가해서 섞여있는 상태로 만드는 현상이다. 출처 : 위키백과

*** Darwin Ortiz, [Scams & Fantasies with cards], Ortiz publication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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